“‘괜찮은 남자’가 있다고 해서 달려가 만나 보니 동갑내기 그 남자는 정말 괜찮았다. 일류대학을 나온 유능한 기업가였다. 첫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다시 만나기로 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하지만 좋은 건 거기까지였다. 운전기사가 늦게 나타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렇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고 부드럽던 ‘괜찮은 남자’가 갑자기 돌변했다. 60대의 운전기사가 주차장 앞길이 막혀 늦어졌다고 해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반말로 큰 소리 치며 내 앞에서 무안을 줬다.
이젠 자기가 직접 택시를 잡아주겠다며 승용차에서 내렸다. 그때 옆을 지나던 시각장애인과 부딪쳤다. ‘괜찮은 남자’가 용수철처럼 한 마디 내뱉었다. ‘에이 재수 없어.‘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중얼거렸다. ‘재수 없다니,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은 바로 너다, 이놈아.’ 택시에서 내리면서 ‘괜찮은 남자’의 기억을 지웠다. 아무리 돈 많고 지위가 높고 배움이 많아도,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비루한 사람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 - 한비야의 ‘1그램의 용기’ 중에서
위의 ‘괜찮은 남자’는 ‘주인-노예’의 주종(主從) 개념이 고착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자기 앞에 나타난 상대방을 적으로 여기고, 단번에 힘으로 제압하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괜찮은 남자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길거리의 시각 장애자에게까지 ‘주인-노예‘의 관계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괜찮은 남자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약체의 상대방이 걸출한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는 결과로 얻은 괜찮은 남자의 우월성은 망가진 이정표와 같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아프리카의 한 작은 나라를 상대로 싸워 10:0으로 압승했다고 가정해보라. 이 승리를 누가 칭송할까.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던 19세기 미국 남부에 존재한 노예의 자녀들은 다른 나라의 노예와 달랐다. 그들이 아무리 마차를 끌고 면화 밭에서 고된 일을 감당해도 매주일 교회에 출석해야 했고 입교,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물론 그들도 노예 시장에서 거래된 것은 사실이다.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노예가 건강한지를 확인하려고 치아를 살피고 눈을 뒤집어 본 것도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노예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여야 한다는 높은 종교적 기준이 미국을 세계 최고의 선진국으로 만든 것은 더 놀라운 사실이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전쟁의 와중에 간신히 살아남아 외딴 곳에서 혼자 숨어 숨죽이며 살았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찾아 왕궁에 불러들이며 말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하나님은 약자의 인격을 존귀하게 다루고 약자의 육체를 소중하게 여긴 다윗의 인품을 주목했다. 하나님은 말씀한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토마스 칼라일은 말했다. “위인의 위대함은 소인을 다루는 솜씨에서 나타난다.” 조지 워싱턴은 늘 측근에게 말했다. “당신이 앉아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기 위해서 다가오면, 아랫사람이라도 일어나서 정중하게 맞아라.” 주변의 괜찮은 사람을 한 번쯤 다시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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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