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숫자를 적을 때에는 쉼표를 추가한다. 그래서 백만을 1000000이라고 적지 않고 1,000,000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숫자를 적을 때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게 정말 당연한 걸까?
1960년대 중반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것과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것 두 가지를 모두 배웠다. 왜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것을 배웠을까? 그것이 한자 문화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것은 영미 문화권의 방식이고.
먼저 한자 문화권의 방식을 살펴보자. 우리는 숫자를 읽을 때 ‘일, 십, 백, 천, 만’으로 진행한 뒤 만 이후에는 ‘만(萬), 억(億), 조(兆), 경(京)’의 순으로 단위가 올라간다. 숫자를 적어보면 1 일 / 10 십 / 100 백 / 1000 천 / 1,0000 만 / 1,0000,0000 억 / 1,0000,0000,0000 조 / 1,0000,0000,0000,0000 경이 된다. 즉 만부터는 숫자 표기 네 자리마다 ‘만(萬), 억(億), 조(兆), 경(京)’의 단위가 올라간다. 그러니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게 맞다.
예를 들어보자. 456329872. 이 숫자에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으면 4,5632,9872가 된다. 뒤에서부터 첫 번째 쉼표를 ‘만’으로, 두 번째 쉼표 자리에 ‘억’으로 바꾸어 읽으면 된다. 그래서 ‘사억 / 오천 육백 삼십 이만 / 구천 팔백 칠십 이’로 읽으면 된다. 우리에게 몹시 편리한 방식이다. 쉽다. 이게 우리의 숫자를 읽는 방식이다.
다음은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영미 문화권의 방식을 살펴보자. 숫자를 적어보면 1 one / 10 ten / 100 hundred / 1,000 thousand / 1,000,000 million / 1,000,000,000 billion이 된다. 이렇게 1,000부터는 숫자 표기 세 자리마다 thousand, million, billion의 순으로 단위가 올라간다. 그러니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게 맞다.
앞에서 예를 든 숫자 다시 등장시켜 본다. 456329872. 이 숫자에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으면 456,329,872이 된다. 뒤에서부터 첫 번째 쉼표 자리에 thousand이, 두 번째 쉼표 자리에 million이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456 million / 329 thousand / 872’라고 읽는다.
그런데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은 이 숫자를 앞의 영문 456 million / 329 thousand / 872를 직역해서 ‘456백만 329천 872’라고 읽는 것은 불편하다. 즉 우리는 ‘사억 / 오천 육백 삼십 이만 / 구천 팔백 칠십 이’라고 읽을 뿐 ‘사백 오십 육 백만 / 삼백 이십 구 천 / 팔백 칠십 이’라고 읽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것이 숫자 읽기에 더 편리하지만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영미식이므로 우리도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고 있다. 그 결과 큰 숫자를 자주 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숫자를 읽을 때 곤란을 겪는다.
아까 보았던 그 숫자 다시 생각해보자. 456,329,872. 직업상 큰 숫자를 자주 만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이 숫자를 한 번에 척 읽어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뒤에서부터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이라고 눈으로 읽어간 후 (모든 쉼표는 무시하고) ‘사억 오천 육백 삼십 이만 구천 팔백 칠십 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 쉼표 앞자리가 백만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6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가면서 백만, 천만, 억으로 읽은 후 ‘사억’이라고 숫자를 읽기 시작해서는 ‘오천 육백 (여기의 쉼표는 무시하고) 삼십 이만’ 그리고 ‘구천 (여기의 쉼표도 무시하고) 팔백 칠십 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만, 억, 조’의 방식은 아니니까 불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미식을 직역해서 ‘사백 오십 육 백만 삼백 이십 구 천 팔백 칠십 이’라고 읽을 수도 없고...
우리의 숫자 읽기는 네 자리마다 끊어서 읽는 방식인데, 현재의 숫자 표기는 세 자리마다 끊어져 있으니 말과 표기 사이에 괴리가 있다. 연습을 통해 익숙해지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다.
만약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한자 문화권이었다면 네 자리마다 쉼표를 찍는 방식이 표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456329872를 4,5632,9872로 적었을 것이고 세 자리마다 구분해서 읽어야 하는 영미 문화권 사람들은 이렇게 표기된 숫자를 읽을 때 애 많이 먹겠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