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따라 트랙 하우스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샌프란시스코와 달리, LA는 길이 넓고 평평해 산책하기가 좋았다. 집마다 표정이 다르고 꽃, 나무도 많아, 걷다 보면 더위도 잊은 채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하루는 산책길에 빛을 듬뿍 머금고 활짝 핀 꽃이 예뻐 가까이 가보니 무궁화였다. 사실 어려서는 짙은 보라와 빨간 무늬의 색 배합이 두꺼워 보이고, 하얀 가루가 묻은 듯 꽃술이 삐죽 튀어나와 좋아하는 꽃이 아니었다. 그런데 빛의 도시 LA에서는 색도 엷고 꽃잎도 얇아 투명해 보였다. 광복절도 있는 8월인데다, 이렇게 예쁜 꽃의 진가를 모르고 살았던 것이 미안해 무궁화에 대해, 정확히는 국화가 된 역사에 대해 찾아보았다.
처음 학명을 지은 칼 폰 린네는 시리아가 원산지라고 알고 히비스커스 시리어커스(Hibiscus syriacus)라고 지었지만 중국과 인도가 원산지다. 영어명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에서 샤론은 평화를 의미하는 중동지역의 들판이고, ‘샤론의 장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하니 아름다운 이름임에 틀림없다.
‘무궁(無窮)’, 즉 ‘다함이 없다’는 연달아 피고지는 무궁화의 특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침에 피었다 밤에는 지고, 다음날 다시 ‘새로운’ 꽃을 피워 여름동안 약 3천개의 꽃을 피운다. 어떤 환경에서도 이렇게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이,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얼을 닮아 국화가 되었을 것이다.
한문으로는 근화(槿花)인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신라 때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문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 무궁화의 나라)이라고 자칭한 기록이라 한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무궁화를 국화로 생각한 역사가 최소 1,200년은 된다. 고려시대의 책 ‘고려도경’에서도 ‘근역삼천리’라 칭한 기록이 있고, 이 말에서 ‘무궁화 삼천리’라는 말이 나왔다. 근대에 와서는 1896년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민족의 상징인 국화가 되었다고 한다.
빛을 사랑하는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과 끈기, 영원함, 순수함’이므로, 이런 속성을 가진 우리 민족이 무궁하게 발전하라는 뜻을 담아 ‘다함이 없는 꽃’이라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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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리(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