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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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것들의 추억

2021-05-29 (토)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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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버스 한 대가 집 앞을 지나쳐간다. 한 시간에 한 대가 올까 말까 한 버스라 눈에 띈 적이 별로 없는데 오늘은 그 버스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버스 안에는 기사 아저씨 말고는 승객이 한 명도 없다. 텅 빈 버스 지나가는 소리에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요즘 나의 교통수단은 오로지 승용차뿐이지만 한국에서는 참 많은 교통수단을 이용하곤 했다. 나도 학창 시절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찬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야근 후 뻔질나게 택시를 탔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가 생각나는 기차를 타고 팔도강산을 다닌 적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학교와 직장을 가던 버스 노선과 빠르게 타고 내릴 수 있는 집 앞 지하철 승강장의 위치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런 소소한 경험들이 내 몸 어딘가에 녹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물론 미국에서도 탈 수 있지만 잘 이용하지 않게 되고 코로나 시대에 대중교통은 더 꺼려지는 것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버스에, 지하철에, 택시에, 기차에 많은 이야기가 넘쳐났었다. 난폭운전을 하던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분노하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스스로 뿌듯해하던 때가 있었다.


여자 혼자 밤늦게 다니면 위험하다고 골목길로 접어들어 집 바로 앞까지 내려주는 친절한 택시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혼자 기차를 타고 갈 때에 옆자리에 누가 탈까 기대하던 때가 있었다. 그 감정들이 내겐 더 이상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던 그 구수한 안내방송을 기억한다. “우리 열차는 이번 역까지만 운행하는 열차입니다.”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는 한국사람들은 ‘우리’의 경험이 참 많은 것 같다. 언택트 시대에 나는 내 승용차만 타고 다니고 주로 나만 타고 다니니 내 이야기만 넘치고 ‘우리’ 이야기는 좀처럼 없다.

‘우리가 내린 종착역은, 누군가의 출발역이기도 하다.’ 광고 일했던 사람으로서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는 일본 JR 철도 광고 카피다. 내가 한국에서 탔던 수많은 탈 것들은 그렇게 누군가에겐 종착역이고, 누군가에겐 출발역이었다.

내가 타고 내린 곳들에 내 이야기가 쌓이고 그 위에 네 이야기가 덮이고 그렇게 ‘우리’ 이야기가 되고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곤 했다.

코로나로 또 자가격리의 부담 때문에 계획했던 한국 여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좋아하는 여행도 못하고 집에서만 지낸 지 일 년이 넘어가다 보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다. 코로나 블루를 겪는지 우울한 기분마저 든다. 여행이 참 간절해졌다. 어디라도 좋으니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백신 접종율도 점차 높아지고 있으니 곧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길 기대해본다. 내가 마지막으로 탄 비행기가 내린 LAX 공항이 언젠가는 내게 또 다른 출발지이길 바라며 나는 인생의 또다른 여행을 꿈꾼다. 그 탈 것에는 또 ‘우리’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되고 가득했으면 좋겠다.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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