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쓰고 지우는 일

2022-04-02 (토)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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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날 때에 자리 잡고 앉아 금방 글을 쓰곤 한다. 가끔은 맘먹고 앉아 ‘써볼까?’ 하면 손이 저절로 글을 쓰고 있기도 한다. 매번 마음에 드는 글을 쓰진 않지만 나는 글쓰기가 재미있고 좋다.

매일 어떤 생각들이 샘솟지는 않기에 무엇인가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을 때가 있다. 마감이라는 시간적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요즘은 육아 때문에 진득하게 앉아 글 쓸 시간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틈틈이 글감이 떠오를 때에 핸드폰에 메모를 해두거나 아이를 재우고 글을 써보려고 노력 중이다.

늦은 밤, 글을 썼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운다. 꾸역꾸역 써놓았더니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이 것이 내 이야기인 것 같지 않아 지워간다. 지우면서도 고심하여 쓴 글인데 금쪽같은 내 새끼를 끊어내는 것 같아 또 마음이 쓰인다. 글을 쓰는 일에도 나 자신을 많이 쏟아부어야 하고 이를 지우는 일에도 많은 감정이 소모된다. 미련 없이 지워야 하는데 못내 아깝고 안타깝다.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 괜히 미련이 남는다. 지우면 다시 내게 안 올 언어들일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는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닮았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함께 첫 문장을 써 내려가는 일에는 엄청난 우연과 마음이 따른다. 그렇게 어렵고 귀하게 써 내려간 글인데 그 글을 지우는 일이 어찌 쉬울쏘냐. 한 글자를 지우는 일도 마음이 부서지고 온 세상이 어지럽다. 어떤 때에는 소설책 한 권을 가득 채울 만큼 긴 글을 썼다가 순식간에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은 때도 있고, 그래야만 할 때도 있다. 백년해로할 것 같던 부부가 하루아침에 헤어지기도 하고 어렵게 품은 아이를 놓치기도 하듯이 말이다. 너와 내가 만나 항상 좋은 글을 써 내려가면 좋겠지만 이 세상 모든 글쓴이들이 다 좋은 글을 내놓지는 못하듯 어떤 글은 사랑받지 못하고 폐기되거나 묻힌다. 어떤 관계도 폐기되거나 묻힌다.

살면서 쓰는 것이 어려운지 지우는 것이 어려운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계속 쓰다 보면 지우는 일도 쉬워질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만, 정말 좋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또 쓰고 쓸 것이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또 다른 인연들과도 지워질 필요 없는 어느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또 만나고 시작하겠지. 그럼 난 여느 때처럼 또 최선을 다해 우리 이야기를 써내려 가려고 한다.

어떤 날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후딱 글 한 편을 써 내려가듯 어느 운수 좋은 날, 나와 꼭 맞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 평생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써 내려가고 싶다. 우리 이야기는 퇴고할 필요 없이 그저 다 좋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펜을 든다. 펜대 끝으로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들이닥칠 것만 같다.

<이보람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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