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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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에서 버스를 타던 날

2022-04-23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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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에 와서 어학원을 다니던 시절 버스를 타고 다니던 날들을 기억한다. 오스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라마라는 긴 길을 다니는 버스였는데, 모팩이라는 하이웨이 너머 한국 학생들이 모여 사는 북쪽의 커뮤니티를 지나, 다운타운과 오스틴의 남쪽에 즐비한 레스토랑과 다른 비즈니스까지 다니는 버스라, 그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버스가 자주 오는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나의 아침 등교시간은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약간의 정체에도 나는 학원에 늦을 까 안절부절 하곤 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고 다시 달려야 할 무렵, 버스 기사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고가 났나 싶어 짜증이 슬그머니 나는 순간, 버스가 큰 경고음을 울리며 앞쪽 출입구 바닥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버스 앞 쪽에 앉아있던 승객들이 일어나 이미 꽉 차버린 뒤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이윽고 휠체어를 탄 승객이 버스 출입구로 이어진 브리지위로 올라 타 앞쪽 좌석 옆에 휠체어를 기댔다. 기사님은 그 뒤를 따라 휠체어를 고정 후, 곧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고, 그 분이 내릴 때도 기사님은 똑같이 일어나 휠체어를 탄 승객을 내려준 뒤, 좌석 정비 후 다시 운전대에 앉아 출발했다. 다 합해 채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저상버스의 자동 내림 장치로 한 장애인 승객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 난생 처음 보았던 저상버스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왜 이제껏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 걸까? 한국에서 장애인들은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이동에 대한 나의 경험은 그 다음 해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된 후 더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 되어버렸다. 대중 교통이 드문 작은 시골 마을로 가면서 나의 생활 반경이 더 좁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문 드문 있는 버스를 타고 집 밖을 나와 찾아가던 도서관도, 차가 없으면 이제는 갈 수 가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월마트나 다른 마트를 가야만 하는 날이면 온 하루의 일정을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야 했다. 자전거를 타기엔 길의 상태가 너무 위험했고, 더운 여름이 긴 텍사스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기본적인 그로서리는 학교 바로 앞 조그만 편의점에서 되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신선한 제품보다는 저장과 보관이 용이한 인스턴트류의 제품을 파는 편의점에서 영양이 골고루 잡힌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건강이 나빠지고 살이 쪘고 머리가 종종 아팠다. 한번은 두드러기가 온 몸에 나 응급실에 가야했던 적도 있었다. 거의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가 없는 것이 나의 세상을 이렇게 좁게 만들어 버릴 줄을 미처 몰랐다.


이렇게 그 전까지 내가 쉽게 누리고 있었던, 그리고 언제까지나 누릴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나의 자유로운 “이동”과 “접근” 이란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는 문제인식은 부끄럽게도 성인이 되고 난 후,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 역시도 장애인들에 대한 처우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가 경험했던 저상버스란 것도 휠체어를 내려다 줄 수 있는 지하철 역의 엘리베이터도 모든 도시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그들의 사회적 기본권을 평등권과 함께 보장해주는 제도와 장치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장애가 있는 학생의 상담 및 다른 인적, 물질적, 사회 문화적인 자원들을 제공하도록 제도가 갖추어져 있고, 그와 관련해 교직원들은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화 되어 있다. 장애인 학생은 수업 시간마다 자신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교수에게 요구할 수 있고, 교수는 더 공정한 배움의 경험을 만들기 위해 지원센터와 협력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잘’ 지원해 주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장애인의 이동권과 접근권은 사회가 “배려”로 챙겨주고 생색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의 권리이다. 하지만 그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과정을 누군가는 ‘소수 집단의 이기주의’ 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불법시위’ 라고도 한다. 혹자는 ‘다른 곳에 쓸 예산으로 지하철 엘리베이터에 그만큼 투자했으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냐’ 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까지 제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얻어낸 장애인의 권리로 그들의 생활이 얼만큼 더 나아졌는지 묻지 않는다. 비장애인들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듯, 장애인들의 시위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시위를 함께 하거나 직접적으로 도움은 못될지 언정, 그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는 멈추자.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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