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월의 선물

2021-03-17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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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관심 때문에 많이 찾아보는 노년문제를 다룬 책들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노년의 ‘긍정효과’ 연구로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이다. 카스텐슨은 거의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정서적 경험을 몇 년에 걸쳐 추적했다. 결과는 일반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 카스텐슨 교수팀은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사진(강아지, 웃는 아기, 해 저무는 사막 풍경)부터 언짢거나 슬픈 사진(뱀, 병원에 입원한 노부부)들을 보여주었다. 얼마 후 조사해보니 젊은 사람들은 부정적 사진을 더 많이 기억한 반면 나이 든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진을 2배나 더 많이 기억했다.

나이가 들수록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젊었을 때는 쾌락적이면서 찰나적인 행복을 추구하지만 나이가 들면 다른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삶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할수록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카스텐슨의 연구에 따르면 행복감이 가장 큰 시기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 사이다.


카스텐슨의 결론은 10여 년 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이 발표해 화제가 됐던 연령별 행복도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2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젊었을 때 행복도가 최고점을 찍은 후 계속 감소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U자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점은 23세와 69세였다. 최저점으로 떨어지는 시기는 55세 전후였다. 중년들이 처한 상황을 떠올린다면 왜 그런지 쉬 이해가 갈 것이다.

팬데믹 기간 중 실시된 미국인들의 심리연구 결과도 일반의 예측을 깨는 것이었다. 팬데믹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한층 더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상황이다.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도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몇 건의 연구에서 예외 없이 같은 결론이 나왔다.

이전 세대 노인들보다 수명이 늘어나고 건강상태가 좋아진 게 노인들의 정서 상태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들이 느끼는 긍정적 감정의 보다 근본적인 원천은 다른 데 있다. 관점의 변화가 그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동기와 목표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도 훨씬 자유로워진다.

물론 23세 때의 행복감과 69세 때의 그것은 결이 다르다. 젊었을 때의 행복감이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감과 성취에서 오는 짜릿함이라면 69세의 행복감은 현재에 만족하는 잔잔한 감정이다. 파안대소와 은은한 미소의 차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마 행복한 순간 분비되는 호르몬의 종류도 도파민과 옥시토신으로 조금 다를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흔히 ‘행복’으로 번역된다. 정확한 뜻은 좋은 일이나 덕 있는 일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정신적 만족을 뜻한다. 그런데 카스텐슨은 뇌를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에우다이모니아나 인생의 목적 따위를 별도로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저 몇 십 년을 더 살기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건강하게 늙어간다면 노년의 행복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어도, 아니 나이를 먹어갈수록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안정적인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된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노화와 함께 불행감이 계속 커져만 간다면 삶은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조물주는 노화에 발맞춰 부정적 감정에 반응하는 편도체의 기능을 둔화시켜줌으로서 우리가 긍정적 감정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삶의 우여곡절과 역경을 통해 얻은 지혜가 더해지면 노년은 비로소 축복의 시간이 된다.

그런 축복의 인식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세월이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소중한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사실은 팬데믹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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