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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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느리게 살기

2021-03-01 (월)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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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따뜻해졌다. 손을 대 만져보지 않아도 그 온기가 느껴진다. 꼬물거리고, 땅 밖으로 싹을 밀어내던 수선화는 벌써 며칠째 노랗고 말간 얼굴로 아침 인사 한다. 아프리칸 데이지(Trailing African Daisy)의 보라색 꽃잎은 밝은 봄 햇살에 그 화려함을 더한다. 내 주먹만한 동백꽃(Camellia japonica ‘Debutante’)은 작은 바람에도 휘청이고, 고개 숙여 핀 모양이 새색시마냥 수줍다. 향긋한 봄바람에 흔들흔들 뒷짐지고 걷는 이런 꽃놀이는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을 요 며칠만 보고 말 게 아니라면 더 게으름을 부려서 안 된다.

타샤 튜더(Tasha Tudor)는 “ 정원을 가꾸는 데는 최소한 12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말한 기다림을 다는 모르지만, 정원 일엔 진득한 기다림이 분명히 필요하다. 씨앗이 발아할 때, 작은 모종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심지어 단풍을 보기 위해서도 기다림은 필요하다. 그리고 가드닝에 있어서 또 하나 기다림을 꼽으라면 난 퇴비(compost) 만들기라 말하고 싶다. 낙엽을 모아 비닐에 넣어 삭혀서 밭에 뿌리려면 적어도 이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먹는 계란 껍질도 모아 햇빛에 말리고, 분쇄기로 갈아 뿌리려면 삼 주 이상이 걸리고, 커피 찌꺼기도 곰팡이 없이 거름으로 만들려면 겨울엔 해를 쫓아다니며 말려야 한다. 가지치기한 나뭇가지도 한 해를 묵혀 말리고, 그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거름으로 만들려면 족히 이 년의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가드닝을 처음 할 땐 내 상상 속의 정원을 빨리 만들고 싶어서, 늘 서둘렀다. 씨앗보단 모종을, 모종도 꽃까지 핀 화분을 선호했다. 거름도 모두 사다 뿌리고, 물도 매일 듬뿍 주며 빨리 자라라고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꽃까지 핀 화분을 땅에 묻어도 내 정원에 어우러지기 위해선 시간이 걸렸고, 아무리 비싼 거름도 땅과 합쳐져 그 힘을 내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걸 몇 해의 실패 속에서 터득했다.

경쟁해 걷느냐고 좁아진 길보단 넓은 길을 느리게 걸으며 살고 싶다. 뜀박질이 좀 버거운 나이여서 이러는 건 아니다. 당장은 좀 초라해도, 기다림으로 가꾸는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알기에 서두르거나 안달하며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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