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압승의 저주

2020-08-1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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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초만 해도 그 해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될 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 9월 린든 존슨 캠페인 본부가 내보낸 ‘데이지 광고’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어린 소녀가 데이지 잎을 하나씩 따며 열까지 세자 핵무기가 터진다. 이 광고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미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들던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대선 주자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그 해 대선은 존슨이 총 유효표 비율로는 지금까지 사상 최고인 61%, 표수로는 당시까지 최고이던 1,595만 표 차이로 이겼다. 이런 압승이 당시에는 기분 좋았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독이 됐다. 선거 결과에 고무된 존슨은 국민은 물론 야당과 당내 의견을 듣지 않고 극비리에 월남전 미군 증파를 결정했다. 공산 베트남군 정도야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다.

그러나 병력을 증파해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1968년 초 일어난 공산군의 텟 공세는 월남전은 가망이 없다는 비관론을 많은 미국인들 마음에 심어줬다. 인기가 끝없이 추락하자 존슨은 아예 그 해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바로 전임자인 존슨의 비극을 지켜보고도 닉슨은 똑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1972년 대선에서 총 유효표의 60%를 차지하고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승리한 닉슨은 기고만장해져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수사하던 특별검사 해임을 명령한다. 법무장관과 부장관이 말을 듣지 않자 차관을 시켜 기어이 쫓아냈지만 이로써 닉슨의 정치 생명도 끝났다. 1974년 8월 닉슨은 미 역사상 처음 사임한 대통령이 된다.

레이건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1984년 선거에서 유효표의 58.8%를 얻어 50개 주 중 49개에서 이긴 레이건이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이 부하들이 적국이던 이란에 무기를 몰래 팔아 그 돈으로 니카라과 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사건이 벌어졌다. 레이건은 뒤늦게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국민들의 신뢰 회복에 실패했다.

클린턴도 마찬가지다. 1996년 선거에서 유효표로는 49% 대 40%, 주로는 31 대 19, 선거인단수로는 379대 159로 공화당의 밥 도울을 이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뒤 곧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다. 그 와중에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미 역사상 두번째로 연방 하원에서 탄핵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압승하며 기세등등하던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나날이 추락하더니 이제는 일부 여론 조사에서 2016년 이후 처음 야당에게도 밀리고 있다. 이와 동시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39%까지 떨어졌다. 4월 총선 직후 70%를 넘어섰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넉달 사이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당은 압승한 기세를 몰아 전통적으로 야당 차지이던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까지 갖겠다고 나왔다. 야당이 반발하자 아예 국회의 모든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했다. 4월 총선 당시 여야 지지율은 49% 대 41%이었다. 8% 이긴 정당이 노른자를 모두 먹는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부동산 3법을 야당과 협의는커녕 토론도 없이 통과시키는가 하면 사법 개혁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려던 윤석열 검찰총장 손발 자르기로 변질됐다.

거기다 위안부 인권 운동을 한다면서 돈을 걷은 단체가 이 돈을 위안부를 위해 쓰지 않았다는 의혹이 위안부 할머니에 의해 제기됐다. 이 단체 소장이자 집권 여당 국회의원인 윤미향은 지금 회계 부정 혐의 등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거돈 부산 시장과 박원순 서울 시장의 성추문이 터졌다. 제1, 제2 도시 시장들이 성추문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여당과 문재인 대통령 핵심 지지 기반인 30대 여성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20여 차례에 걸친 대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집이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상대적 박탈감에, 있는 사람들은 있는 대로 나날이 오르는 세금에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다. 이러고도 정부 여당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조금 잘 나가면 우쭐하게 돼있다. 그리고 그 우쭐함 속에 몰락의 씨가 자라는 것이다. 누구나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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