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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보건국방’

2020-04-01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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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대처방식에 국제사회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공격적인 진단검사와 조기격리를 통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고 있다. 무기력한 대응 속에 바이러스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확연히 비교된다. 이 배경에는 한국의 단단한 공중보건 시스템과 전국민 건강보험이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이후 한국 보건당국은 진단검사 체계를 담당하는 컨트롤 타워를 구축하고 민간부문과 협력해왔다. 이 덕에 코로나19 진단시약 긴급승인과 바이오 업체들의 재빠른 제품 생산이 가능했다. 이런 협업 시스템 덕에 코로나19 초기 하루가 걸리던 감염여부 확인이 3~6시간으로 4배 이상 빨라질 수 있었다.

건강보험 시스템 또한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든든한 방패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는데 드는 비용은 100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다. 신속한 검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의료비 부담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진단의학을 전문의 과정으로 둬 교육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 과정을 통해 배출된 전문의가 1,000명이 넘으며 이들은 코로나19와의 전쟁 일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한국의 모습과 달리 미국의 코로나19 대처는 취약한 의료시스템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후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건강보험 시스템은 기형적인 형태가 된지 오래다. 탈규제 바람 속에 의료비는 치솟고 보험료 또한 폭등했다.

‘건강보험 국제연맹’(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Health Plans) 조사에 따르면 미국 병원의 하루 평균 입원비는 4,293달러이다. 한국이라면 한달 입원비에 해당할 돈이다. 그러니 무보험자가 3,000만 명에 달하고 그나마 보험이 있는 사람들도 본인 부담금 때문에 병원가길 꺼리게 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트럼프 정권은 공중보건 관련 예산을 지속적으로 깎아왔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국립보건원 예산을 대폭 삭감해 왔으며 감염병 연구와 백신개발 지원 예산도 줄였다. 대신 국방 예산은 매년 큰 폭으로 늘려왔다. 이런 제반 상황은 잠재적 감염자들의 진단 기피와 당국의 진단능력 부족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에 미국이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데는 이런 의료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가운데 코로나19 확진자는 하루 수만 명씩 무서운 속도로 폭증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은 미국 정치권에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공공보건과 의료문제는 국방만큼이나, 아니 국방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외부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 국방이다. 코로나19 재난에서 드러났듯 공중보건 시스템의 붕괴는 물리적 전쟁보다 훨씬 더 큰 피해와 타격을 국민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

평화 시에 천문학적 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 한번 써 먹기 위해서다.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서 상대 공격을 억지하는 것이 강군이고 잘된 국방이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평소 바이러스의 침투를 철저히 막아내고 일단 뚫렸을 경우에는 조기에 이를 신속히 퇴치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단단한 공중보건 및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이것이 바람직한 ‘보건국방’이다.

민영화라는 미명 아래 지속적으로 실종돼 온 의료부문의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줄 수 있는 ‘보건국방’은 불가능하다. 보이는 적에 대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적을 볼 줄 아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바로 그렇다. 이런 적의 위협을 깨닫고 평소 철저히 대비할 줄 아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상상력이고 혜안이며 통찰력이다. 공중보건 예산은 마구잡이로 깎으면서 군비증강에만 골몰해온 트럼프에게는 이것이 결여돼 있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하지만 ‘보건국방’은 너무나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는 게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코로나19 재난은 ‘보건국방’에 대한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생각을 바꾸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 그래야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의 끔찍한 피해가 헛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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