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디캘 또 깎겠다고?

2020-02-20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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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들어 2020년 대선의 투표 시작과 ‘기생충’ 오스카 수상 뉴스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주요 소식 하나가 슬그머니 파묻혀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2021 회계연도 예산안이다.

지난주 의회에 제출된 이번 예산안의 골자는 트럼프 집권 후 매년 예산안이 그랬듯이 국방예산 늘리기와 저소득층 복지 지출 줄이기로 요약된다. 메디케이드와 푸드스탬프에서 주거 지원과 학자금 대출 보조에 이르기까지 기본 복지혜택들에 전방위 공격을 가하고 있어 마치 ‘가난한 사람들과의 전쟁’을 벼르는 듯 보인다.

만약 입법화된다면 이 예산안은 미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면서 빈부격차를 한층 악화시킬 것이다.


다행히 대통령의 예산안은 입법화될 가능성이 낮은 ‘정치적 메시지’에 가깝다. 그러나 중요하다.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예산안은 숫자로 표현된 현 행정부의 국정방향이다. 트럼프처럼 재선 앞둔 대통령에겐 집권 2기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예산안 공개 이틀 전 트럼프는 트윗을 통해 “여러분의 소셜시큐리티와 메디케어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2월초 국정연설에서 강조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가 예산안에서 그 약속을 어겼는가의 여부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복지예산에 대한 이번 예산안의 메시지는 “삭감, 삭감, 또 삭감”이지만 충실한 유권자인 수천만 노년층 각자의 소셜시큐리티 연금과 메디케어에는 감히 칼날을 겨누지 않았다.

소셜시큐리티의 장애인 혜택 등에서 450억 달러를 삭감하고 있지만 은퇴연금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메디케어 삭감은 포함되었다. 삭감 액수가 향후 10년 무려 4,650억 달러나 되지만 삭감 대상이 병원 등 의료공급처다. 노인 수혜자들의 베니핏을 줄이거나 보험료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건드리면 죽는다”는 ‘정치적 성역’인 소셜시큐리티 은퇴연금과 노인 의료보험 메디케어는 직접 삭감을 피해갔다.

메디케이드는 다르다. 향후 10년 9,200억 달러로 책정된 삭감은 수혜자격 강화와 혜택 범위 축소를 통해 수혜자를 직접 겨냥한다. 성인의 경우 취업이나 구직을 필수 전제조건으로 부과하거나 수혜자의 자산 제한을 재규정 하는 등으로 문턱을 높이고 있다.

메디케이드 혜택 유지는 현재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끝없이 복잡한 서류 제출과 매달 약간의 소득 변화에 따른 수혜자격 박탈 등으로 메디케이드를 계속 받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방해가 없어도 이미 충분히 힘든 과제다.

캘리포니아에선 ‘메디캘’로 불리는 메디케이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의료보험이다. 수혜인구가 메디케어보다 많은 7,400만명에 달한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민 3명 중 1명이 혜택 받고 있다. 이번 예산안은 가뜩이나 재원이 부족한 메디캘을 또 깎겠다는 트럼프의 경고인 셈이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부터 메디케이드를 겨냥해 왔다. 의회의 제동으로 입법화엔 성공하지 못했으나 행정부 규정으로 끊임없이 삭감을 시도했다. 이번 예산안에 포함된 수혜자격 강화 정책 중 일부는 이미 시행에 들어갔었다. 메디케이드를 받으려는 성인은 취업이나 구직, 직업훈련 등을 해야 한다는 근로필수 규정의 경우 15개 공화당 주에서 시행허가를 받았다.

그 결과로 아칸소 주에선 1만8,000명이 수혜자격을 박탈당했고 켄터키 주의 경우 그 숫자가 9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법정투쟁에 돌입한 후 연방지법의 집행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다. 아칸소 주정부가 항소했으나 지난 주 패소했는데 대법원에 상고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예산안은 외부 전문가들보다 장밋빛인 경제전망을 근거로 하는 것이 통례이긴 하지만 트럼프의 경우 지출삭감 희망과 비현실적 경제 낙관이 지나쳐 완전 새로운 수준의 ‘판타지’ 예산이라고 포브스는 지적하고 있다. 특히 2020년 2.8%에서 2021년 3.1% 등으로 예측하는 경제성장률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이다.

부채와 적자가 날로 증가하는 연방정부 재정 난국 해결의 한 부분으로 지출 삭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삭감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집중되는 것은 잔인하다. 더구나 금년에 1조 달러를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연방적자의 주 원인은 대기업과 부유층에 압도적으로 혜택을 준 트럼프의 감세로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예산안은 적자 해소를 위해 저소득층 환자들이 의지하는 메디케이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인 푸드스탬프, 서민자녀들의 학자금 대출 지원, 장애인 혜택…이미 취약해진 사회안전망을 더 잘라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모든 대통령들의 예산안은 의회에서 ‘도착 즉시 사망’으로 간주되어 왔으니 트럼프의 대폭 삭감도 입법화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11월 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되고 공화당이 하원까지 장악한다면…트럼프의 무자비한 ‘희망사항’ 중 상당부분은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조용히 제출된 트럼프 예산안의 내용을 유권자인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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