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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삶] 기러기는 홀로 날지 않는다

2019-05-23 (목) 12:00:00 김희봉/수필가 ^Enviro Engineeri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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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기즈(wild geese)’는 북 아이리쉬 용병대의 별명이다. 대담하고, 치밀하며, 첨단 병기 사용에 능해, 위험한 임무를 한치 오차도 없이 처리해 내는 세계적 엘리트 용병 여단 중의 하나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이들의 리더는 40대의 흑발 미남, 캐빈 암스트롱. 카리스마 넘치는 그는 부드러운 신사의 매너도 함께 갖춘 비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난 80년대, 영국 감옥에 투옥된 300여명의 북 아이리쉬 정치범들을 전광석화처럼 구출해 낸 용병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와일드 기즈를 직역하면 ‘야생 거위’쯤으로 잘 날지 못하고, 뒤뚱거리는 집 거위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와일드 기즈는 장거리를 나는 ‘기러기’가 주종(主種)이다. 이 들은 세계에 약 40여종 되는데,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에 골고루 서식한다. 우리가 사는 북미에선 캐나다 기즈가 제일 보편적이고, 한국과 일본 등 극동지방에선 갈색 털에 진황색 발을 가진 ‘스완 기즈’가 흔하다. 우리가 부르는 가곡, ‘기러기 울어예는’고향 하늘 구만리를 나는 그 멋진 조류인 것이다.


밀튼 올슨(Milton Olson)은 와일드 기즈를 소재로 여러 편 글을 남긴 작가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이 철새들의 생태를 깊이 파고들어, 이들의 일사불란한 기동력, 조직력, 그리고 단체생활 속의 협동력을 소상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와일드 기즈가 왜 정예 용병 여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고, 과학자 못지 않은 작가의 관찰력에도 놀라게 된다.

와일드 기즈는 백조와 청둥오리의 중간쯤 크기의 물새다. 그러나 그들은 물에서 뿐 아니라 뭍에서도 익숙한 양서류(兩棲類)에 가깝고,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다. 봄엔 북쪽 캐나다, 아이슬랜드나 알래스카 등지까지 수백, 수천 마일을 날아가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면 온 거리를 다시 되밟아 따뜻한 멕시코나 플로리다까지 내려온다.

와일드 기즈는 초봄, 북쪽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둥지를 틀고 서둘러 알을 낳는다. 그리고 약 한달 만에 새끼를 부화시킨 후, 그해 가을에 있을 남쪽으로의 대 장정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한다. 온 식구가 부지런히 콩이나 수초 등 먹이를 찾아 몸을 살찌우고,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고, 어른 새들은 말끔한 털갈이로 날개를 튼튼하게 한다.

작가, 밀튼 올슨은 와일드 기즈의 특징을 대개 5가지로 관찰하고 있다. 그는 철새들의 특징들을 묘사하면서 은근히 인간사회의 비판과 함께, 우리 생활인 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교훈들을 흥미롭게 덧붙이고 있다.

첫째 특징은 와일드 기즈들이 V자로 나는 형태이다. 그들이 V자로 떼를 지어 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 나는 새가 날개를 펄럭이면, 그것이 공기의 뜨는 힘, 곧 양력(揚力)을 불러 일으켜, 바로 뒤에 따라오는 새가 날기가 훨씬 수월하다. V형으로 날면, 혼자 나는 거리의 거의 배인 72% 더 멀리 날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도 제시하고있다. 함께 사는 우리들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서로 밀어주고, 도와주면, 훨씬 빠르고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음을 올슨은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 특징은 철새들이 V자형으로 날다가, 잠시라도 대형에서 이탈돼 날개에 공기저항을 느끼게 되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장거리 비행에 힘을 아끼기 위해, 그들은 불필요한 무리나 독불장군 행세는 피하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철새들 만큼만 철이 들었다면, 모두에게 유익한 공동목표를 위해 사사로운 고집을 버리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아집 때문에 동료들과 불화하고,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허다한 것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셋째, 와일드 기즈들은 장거리를 날면서 앞장선 리더가 피곤해지면, 그는 곧 뒤로 돌아가고, 따라오던 철새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그 대열을 리드한다는 점이다. 인간 공동체 생활에서 힘든 일과 리더십을 서로 나눌 줄 알면, 그 단체는 발전하고, 구성원 전체가 득을 보는 점과 똑같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독선과 어려운 일은 남에게 미루는 습관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해를 입히는 일밖에 되지 않음을 새겨 보게 하는 것이다.


넷째, 와일드 기즈들은 장거리를 날면서 앞장선 리더가 속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울음소리(honk)를 계속 낸다는 것이다. 모임에서 인간들이 내는 소리 중 격려하는 소리가 얼마나 될까? 올슨의 지적처럼, 공동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뒷짐만 지고 서 있다가, 어려움에 처하면, 고생한 사람들을 향해 앞장서서 불평하고 헐뜯는 행태가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운 특징은 대열에서 날던 철새 중 한 마리가 아파 뒤쳐지거나, 총에 맞아떨어지면, 한 두 마리가 대열에서 빠져 나와 뒤쳐진 철새를 돕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낙오된 철새의 죽음을 확인하거나, 혹은 다시 살아나 함께 날 수 있을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본다고 한다. 얼마나 기가 막힌 협동심의 극치인가?

올슨은 인간들이 곤경에 처한 동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동지애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생명을 나눈 동물들의 가장 큰 덕목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다.

신화적인 용병대장 암스트롱이 스스로의 부대를 ‘와일드 기즈’로 부른 데는 희생과 협동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고결한 정신을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오늘을 사는 너와 나의 삶에 인간애의 고결성이 얼마나 살아있을까?

<김희봉/수필가 ^Enviro Engineeri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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