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미샤 마이스키와 릴리 마이스키

2019-05-15 (수) 유정욱(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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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출신인 미샤 마이스키는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한 첼로 거장 중의 하나이다. 호불호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대중들은 그의 연주를 사랑한다. 함께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그의 딸이다. 지난 4일 SF 헙스트극장에서 개최된 연주를 보고 나는 시작 전부터 의구심 반 기대 반이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비롯한 유수의 피아니스트들과 오랜 호흡을 맞추었던 그가 근래에는 딸과의 잦은 연주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사실 가족의 이점인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췄던 탓인지 둘은 감정선에도 한 호흡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듯하다. 앙상블은 함께 어우러져 묻어 가다가도 또 서로 팽팽해야 하고 그러다가 힘있게 혹은 대등하게 몰아쳐야 한다. 그러나 주로 아버지에게 묻어가는 딸 릴리의 연주를 보면서 그다지 앙상블의 조건으로는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이 평론가로서의 견해이다.

그것을 아는 미샤 마이스키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전반부를 마치고 후반부로 넘어가고 그 다음 앵콜곡을 들으면서 미샤의 연주에서 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배려도 아니고 내려놓음도 아닌 허심평의(虛心平意), 즉 마음에 욕심을 비우는 담담함이었다. 그에 반해 딸 릴리는 후반부 연주로 접어들면서 본인의 아이디어를 학예회하는 어린 딸내미처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날의 미샤의 연주는 체제나 사상도 억압할 수 없었던 낭만에 살고 죽던 그가 아닌 아버지 미샤 마이스키로 다가온 것이다. 그도 아버지였다. 모든 연주자들을 제 페이스로 끌어다가 붙였던 그가 딸을 위함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그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처럼 관조(觀照)하는 연주자로 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게 점점 딸에게 마음을 비워가는 그의 모습에 세상에 모진 부모는 있어도 원래 나쁜 부모는 없다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유분방한 음악의 정신을 위해 망명까지 감행한 그가 말이다.

5월은 부모님에 대해 좀더 생각하게 되는 달이다. 부녀지간인 미샤와 릴리를 보면서 냉철하게 분석하려던 나의 평자적 마음에서 애틋함이 느껴졌다. 객관적인 음악이 아름다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음악에도 객관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였다고 말해두고 싶다.

<유정욱(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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