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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바느질 땀

2019-04-18 (목) 12:00:00 김명수(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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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을 돌아가신 후에야 들었다. 아버님이 일본군으로 징병당했을 때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끝까지 이긴다고 떠들고 있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전쟁터에 가면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싸우려 가는 걸 피할 수도 없었다.

어머님은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내복을 하나 사서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느질 실땀을 하나씩 메꾸어 갔다고 했다. 그 한 사람 다치지 말고 살아 돌아오라고 바느질 실땀에 고리를 묶어 하나씩 만들 때마다 실땀과 고리 만드는 사람의 소원과 정성이 들어가 이루어진다 하였다. 어머님이 사람들 북적거리는 길거리에 앉아 창피도 무릅쓰고 모르는 사람에게 허리 굽혀 절을 해가며 바느질 땀 하나를 부탁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느질 땀 백개가 넘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였다. 아버님은 군복 안에 그 내복을 항상 입고 계셨다. 어느 날 겉옷을 벗고 보니 그 내복에 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 내복을 버리지 못했다. 햇볕 있는 양지 바른 곳에 가서 한마리씩 이를 다 잡아 죽인 후 다시 그 내복을 입으셨다. 그러면서 어머님을 항상 그리워했다 하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소속해 있던 부대의 반이 만주로 가라고 발령받았다. 다음 날 아버님만은 남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 후 만주로 갔던 군인 모두가 전사를 했고, 일본에 남아있던 군인들에게도 후퇴할 경우 자진해 명예롭게 죽으라고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고 일본 황제가 무조건 항복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중 아버님이 탄 기차가 원자탄 핵이 떨어졌던 히로시마를 지나쳤다. 아버진 기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처참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뉴욕에 갔을 때 UN 본부 빌딩 안을 아버님과 같이 견학한 적이 있다. 그 곳 방 하나에 히로시마 빌딩 파편의 녹아내린 흉칙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그때를 회상하고 계셨다. 원자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기차 창문으로 직접 보고 실감하던 1945년의 어느 하루를.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아버님이 살아서 오셨기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니 감격스럽다. 또한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을 들으며 나 또한 남편을 위해 주님께 성심껏 기도해보고자 다짐한다.

<김명수(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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