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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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꿀 먹은 벙어리

2019-04-05 (금) 12:00:00 정윤희(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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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일이다. 세이프웨이 마트 계산대에서 결제를 하는데 캐시어가 뭐라뭐라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번을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해주는데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 없었다. 내 뒤로 줄 서있는 손님들은 빤히 나를 쳐다보고,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창피한 마음에 얼굴은 물론 귀까지 뻘개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투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이었는데 그 간단한 말조차도 알아듣질 못해 애를 먹었던 것이다.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봄방학부터였다. 아버지는 입학도 하기 전 영어 교과서 한권을 미리 예습시켰다. 그렇게 선행학습을 시킨 것도 모자라 영어 과외를 학교 다니는 내내 보냈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3때는 새벽 5시에 시작하는 영어 과외수업을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여전히 과외를 다녔지만 80년 전두환 정권의 7.30 교육 조치로 곤혹스러운 과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영어는 대학 합격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과목이었기에 모두들 영어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과서와는 별도로, 많이들 기억하고있는 ‘성문종합영어’ 떼기가 우리시대의 필수코스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한 공부는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말하기 공부’가 아닌 ‘점수 올리기 공부’였음을 이방인이 되고 나서 더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10년 이상 영어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받은 영어교육은 남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알면서도 말을 할 수도 없는 무용지물의 교육이었다.

미국에 온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영어는 제자리고 공부할 땐 다 알 것 같은데, 연습을 해도 금새 잊어버리고 막상 대화를 할때는 실생활에서 쓰는 간단한 표현조차도 버벅거린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며 어려움인지… 영어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 살아 보고 싶어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와서는 결국엔 ‘꿀 먹은 벙어리’에 그것도 모자라 ‘벙어리 냉가슴’까지 앓고 살아가고 있다. 내 영어에 안개가 걷히는 날이 언제일른지 자꾸 먼길을 돌아가는 답답한 느낌이다.

<정윤희(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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