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등한 세상’을 위한 물결

2018-01-04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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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워싱턴의 새해는 어제 2명의 새 상원의원 취임선서로 막을 열었다.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 운동’의 물결에 실려 상원에 입성한 티나 스미스와 덕 존스, 민주당의 뉴 페이스들이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가 없었더라면 스미스의 전임인 미네소타 연방 상원의원 앨 프랭큰은 성 추문에 휘말려 사퇴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한 앨라배마의 로이 모어가 존스 대신 당선되었을 것이다.

2017년은 격동의 한해였다. 예측불허의 트럼프 시대는 대다수 미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충격을 주었지만 여성들에게 특히 그랬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추행 고발과 만천하에 공개된 여성비하 발언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 날 미 전국 수백만 여성들의 대규모 행진으로 시작된 한 해는 사회 각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의 물결이 용솟음치며 저물었다.

여성들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용기가 결집하면서 들불처럼 번진 ‘미투’의 영향력은 여성 자신들도 놀랄 만큼 강력했다. 지난 10월 할리웃 연예계에서 시작된 성폭력 고발은 즉각 언론계, 정계, 재계로 확산되었고 세상은 돈 많고 유명한 권력자들이 ‘혐의’만으로 줄줄이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관대했던 예전의 성추행 고발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다. 성추행은 설 자리가 없어졌고, ‘미투’는 이를 처벌하는 사회적·문화적 심판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미투’를 주도한 전문직 여성들이 ‘침묵을 깬 사람들’로 각광받고, ‘페미니즘’이 반세기만에 다시 최대 관심사의 하나로 재조명되고 있지만 아직은 보복과 생계가 두려워 침묵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최대 대규모의 행진도, 전국을 덮친 무브먼트도 정치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일회성 감정 표출로 사그라지고 만다. 2017년의 ‘미투’를 동력으로 2018년을 진정한 정책 수립을 위한 정치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투’는 지난달부터 워싱턴을 본격적으로 뒤흔들기 시작했다. 27선 연방하원의원 존 코니어스에 대한 성추행 고발 및 합의금 무마 의혹이 첫 폭탄이었고, 이미 앨 프랭큰을 비롯한 민주·공화 양당의 여러 명 의원들이 사임하거나 재선 불출마를 발표했다.

그러나 연방의회의 성추행 파문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NBC는 의회 소식통을 인용해 경고한다. 연방의회 내 264건의 성추행 관련 비공개 케이스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회 책임법’을 위반한 성적 불법행위관련 기록이다. 1997년 이후 1,700만 달러의 세금을 들여 합의를 본 260여건의 성추행 케이스들이 어떤 경로로든 유출될 경우를 상상해보라.

양당 현역의원들이 이 대다수 불법행위의 장본인들이니 거센 ‘미투’의 물결 속에서 치르게 될 2018년 선거에선 어느 지역, 어느 의석도 “안전하다”고 장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여성후보들에게 더 친화적인 선거환경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성행진과 ‘미투 운동’으로 확인한 스스로의 역량을 정치적 힘으로 결집시키며 여성들은 2018년을 ‘여성의 해’로 기록할 수 있을까.

미국의 여성인구는 전체의 절반을 넘고 전체 유권자의 56%가 여성이지만 정계의 여성 대표성은 극히 빈약하다. 연방의회 여성의원은 어제 스미스의 취임으로 전체 535명 중 106명, 20%가 채 안되며 주지사는 6명에 불과하다. 주의회와 대도시 시장 등 모든 선출직에서도 20~25%선에 머물러 있다. 기니와 파키스탄보다 낮고 2015년에 처음으로 여성 투표권이 허용된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못한 세계 101위에 처져있다.


‘여성의 해’로 대서특필되었던 것은 1992년이었다. 91년 연방상원 법사위의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 인준 청문회에서 아니타 힐의 성추행고발 증언이 계기가 되었다. 법대교수 힐은 젊은 시절 상사였던 토머스의 성추행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했지만 남성 일색의 법사위원들은 힐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적대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여성들은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으며 당적을 떠난 그들의 공감대는 폭발적인 정치참여로 이어졌다. 92년 선거로 연방의회 여성의원은 55명이라는 최고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여성의 해’ 거품은 곧 스러졌고 그 후 10여년 여성의 정치 대표성은 조금씩 진전을 보여 오다가 이제 다시 충격과 분노가 결집해 폭발하고 있는 2018년을 맞은 것이다.

금년은 좀 다를 것이라고 여성계와 정치전문가들은 예상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후보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36개 주에서 치러질 주지사 선거엔 이미 79명의 여성후보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여성들의 공직출마를 지원하는 단체 에밀리 리스트에는 2016년 대선 후부터 현재까지 2만6,000여명이 접촉해 왔다. 그 전해 960명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다.

출마한다고 다 승리하는 것도, 한 번의 선거로 모든 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공감대는 이루어졌다. “우리 스스로 출마하지 않으면, 우린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며 살기 원하는 커뮤니티와 나라를 가질 수 없다”고 미시간 주지사에 출마한 한 여성후보는 말한다.

‘미투 운동’을 발판 삼은 여성의 해라고 해도 여성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머니와 누이와 딸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원하는” 남성들의 동참이 필요하다.

성추행 고발은 어느 특정한 소수의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나 보수의 이념적 문제도 아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맞서는 당파적 논쟁 이슈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 보장이다. 평등한 세상을 위한 ‘미투’의 물결이 쉽게 멈추어질 리도 없고, 멈추게 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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