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바마케어의 앞날

2017-09-28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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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케어 폐지 법안이 또 다시 무산됐다. 다행이다.

공화당 상원 지도부는 26일 아마도 금년 중 오바마케어 폐지의 마지막 시도였을 ‘그레이엄-캐시디’ 헬스케어안을 표결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통과에 필요한 지지표가 부족해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오바마케어가 지금까지 수차례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사회생한 것이다.

폐지 법안 무산은 캘리포니아의 750만명을 포함한 수천만 미 국민들이 메디케이드 지원 대폭삭감 때문에 무보험자로 전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병력을 가진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보험료 인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가장 기본 안전망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던 서민들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해준 것은 공화당 상원의원 3명의 양심과 소신이었다. 존 매케인, 수전 콜린스, 랜드 폴의 반대가 상원 표결을 막은 것이다. 가장 먼저 반대를 표명한 폴은 오바마케어 수혜자들 보호가 아닌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극우보수의 소신을 대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바마케어를 지켜내는데 한 축을 담당한 셈이 되었다.

오바마케어에 대한 연방예산을 각 주정부에 배분하여 주정부가 자율적으로 건강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하는 이번 헬스케어 개혁안은 린지 그레이엄과 빌 캐시디가 공동제안한, 가장 과격한 오바마케어 폐지안이다. 메디케이드 통한 보조가 대폭 삭감되고 주의 방침에 따라 기존병력자에 대한 보호가 아예 제거될 수도 있다.

연방 ‘큰 정부’를 지양하고 주 정부 권한 확대라는 보수의 가치관을 토대로 한데다 공화당의 숙원인 오바마케어 폐지를 실현시킬 ‘마지막 기회’라는 지도부의 설득이 효과를 내면서 그레이엄-캐시디 법안은 공개 한 주 만에 눈에 뜨이게 상승세를 보였다. 지도부는 통과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했고 민주당과 오바마케어 지지진영은 아연 긴장했다.

‘폐지’ 낙관 분위기에 제동을 건 것은 지난주 금요일 매케인의 반대 선언이었다. 지난 7월말 폐지안 표결에서도 결정적 반대표를 던져 부결시켰던 매케인이 이번에도 “양심상 도저히” 지지할 수 없다며 치명타를 날린 것이다. 법안의 공동작성자인 그레이엄과 소문난 절친이어서 지지를 예상했던 당내엔 충격파가 일었고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개진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포괄적 청문회도, 심도 있는 논의도, 민주당이 참여하는 수정 절차도 모두 생략해버린 졸속 진행을 강력히 비판했다. “헬스케어는 너무나 중요한 이슈다. 너무 많은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 국민들에게 정권이 바뀌는데 따라 건강보험 가입 여부를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이처럼 중요한 법안엔 초당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뇌암 투병 중인 81세의 매케인은 자신이 왜 우정보다 양심을 택했는가를 설명했다.

이번 주 들면서 먹구름은 완연했다. 월요일 이 법안 시행 시 수백만명이 보험을 잃을 것이라는 의회예산국(CBO)의 부분 보고서가 나왔고 보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하소연을 기억하는 콜린스 의원의 반대가 발표되자 ‘그레이엄-캐시디의 부음’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지역구에 수억달러 기금을 더 주겠다는 회유도, 트럼프 대통령의 인신공격 트윗에도 이들 3명은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화요일,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대표는 표결 포기를 발표했다.


오바마케어 폐지는 공화당의 7년 공약이고 지금 워싱턴은 공화당 천하인데 폐지 시도는 왜 번번이 무산되는 것일까. 기술적으로는 공화당 내분으로 인한 지지표 부족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폐지’ 이후 ‘대체’에 대한 아이디어 빈곤 때문일 것이다. 온라인 해설매체 ‘복스’는 국민들은 헬스케어제도의 ‘개선’을 원하는데 공화당의 대체안들은 ‘개악’을 추진해왔다고 진단한다.

공화당의 현재 헬스케어 개혁의 근간은 오바마케어 폐지다. 그러나 일각의 지적처럼 ‘폐지와 대체’는 슬로건이지 정책이 아니다. 캠페인 중에는 “…을 반대하라”는 선동적 슬로건으로 충분했지만 통치를 시작하면 “…을 지지해 달라”고 설득하여 수립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수천만명의 무보험자를 다시 양산하고 만성 질병자를 다시 죽음과 파산으로 내몰게 할 ‘개악’의 후유증을 국민들이 우려하는 한 ‘폐지와 대체’의 통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오바마케어는 ‘마침내’ 안전해진 것인가. 그건 아니다. 7년여에 걸쳐 수십차례의 폐지안 표결, 4차례의 연방대법 판결 등 끊임없는 정치공격을 견디며 버티어 왔지만 입지는 여전히 불안하다. 이번에도 공화당 지도부는 폐지안의 재추진을 재천명했다.

이미 2018년 회계연도 예산안 처리 때 조정절차를 활용해 세제개혁과 묶어서 재시도 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고, 세제개혁 하나만으로도 버거우니 2019년 회계연도 때 시도하자는 제2안도 나왔다. 복스의 지적처럼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폐지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오바마케어는 ‘폐지와 대체’가 아닌 ‘유지와 개선’되어야 한다는 USA투데이의 주장은 매케인이 강조하는 초당적 협상을 전제로 한다. 양극화된 현재 정치 환경에서 ‘초당적 헬스케어’의 전망은 ‘아주 흐림’에 머물러 있지만 어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과의 협력도 고려할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워싱턴의 화두는 이제 ‘세제개혁’으로 옮겨졌고 오바마케어 폐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또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알 수 없으나 당분간은, 최소한 금년 중에는 메디케이드 대폭 삭감의 위협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기존 병력자의 보험료도 급등하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은,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게, 아파도 된다는 작은 위안이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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