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지은 칼럼] 석양이 내리는 풍경

2012-10-19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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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히 그 시간, 그 길을 가고 있었다. 오로라 동쪽 얕은 언덕에서 서쪽을 향해 가는 길. 멀리 보이는 산 위로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하늘을 머리에 인 커다란 태양은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산 속으로 내려 앉는다. 산들의 일렁임은 뭉게 구름의 모양에 따라 달라지며 다홍으로 물든다. 켜켜이 다른 색 하늘은 금새 웃는 얼굴이었다가 금새 또 다른 넒은 나뭇잎 모양을 만들고 또 그러다간 흔들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과 석양을 본적은 언제였던가. 사진기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준비되지 않았고, 고운 색깔과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길 수 있는 재주도 없으니,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그 웅장한 일출의 동해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고 표현 해 보는 수밖에.

지나 가는 창 밖으로 부부 같이 보이는 노년의 두 사람이 속보를 하고 있고 뒤를 이어 젊은 여인이 유모차를 밀며 뛰고 있다. 담이 없는 집들의 마당엔 이름 모를 꽃들도 피어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참으로 평화로운 한 폭의 풍경화. 한참을 이어지는 마을 풍경들이 저녁 노을을 받아 따스하다. 한 모퉁이를 돌자 붉은 석양은 갑자기 나무 끝에 걸린 듯 하다. 긴 허리를 가진 자작 나무 잎에 흔들리던 하늘이 잘게 부서진다. 그러다가 하늘은 점점 분홍으로 옅어 가고, 태양은 산들 속으로 완연히 내려 서며 손톱 끝에 조금 남아 있던 봉숭아 물처럼 잦아 든다.

AURORA, 로마 신화에서 여명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도시의 이름을 ‘오로라’라고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억 속에 그려 진 도시의 신비스런 아름다움이 오래 기억 될 것이다.

석양은 지는 햇살의 마지막 힘이다. 맞다 아 있는 하늘과 구름과 또 다른 자연들과 어우러져 매일 매일 각각 다른 풍경들을 연출한다. 태양은 떠서 중천이지나고 나면 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유년이 지나고 청년이 지나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된다. 누구나 제 인생의 나이에 걸맞은 모습으로, 자연 그대로 있을 수 있을 수 있다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청년이었을 때는 열정으로, 중년이었을 때는 과욕을 버리고 스스로를 향상시키며, 노년이 되면 베풀 줄 아는 모습. 저물어 가는 인생 길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처럼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마지막 힘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며 황홀하고 신비스러운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고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풍경은 가끔,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그날의 일기에 따라 혹은 주위의 풍경에 따라 다를 수 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허욕을 부리지 않는다. 보여 지기 위해 애쓰지도 않고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어색함 또한 없다.

있는 그대로, 그 시간, 그렇게, 그 자리에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풍경의 어우러짐,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 인생도 쓸데 없는 겉치레나 오기 같은 자랑이 없을 때 순수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 모두, 이제 그만 허영을 벗어 버리자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걸까.

오로라에서 만난 한 폭의 풍경화, 기억의 도화지에 곱게 그려 져 있다. 오래 오래 바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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