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이예지ㅣ이혼서류를 캐첩에 찍어먹는 여자

2012-08-27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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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연극과 연기수업 오디션이 정확히 20시간 20분이 남았다. 평소 부끄러움을 쉽게 타는 내가 연기 오디션이라니. 그것도 4분의 감독님들과 교수님들 앞에서 60초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원맨쇼를 한다니, 나로서는 기겁할 만한 일이다.

몇년 전 대학로에서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로 돌아간다.“보고 싶습니다”라는 연극을 본 후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 영화관보다는 소극장을 다녔다. 관중으로서 느꼈던 감정을 직접 연출해 보고 싶은 마음에 언젠가는 연기를 해보겠다고 생각했고, 직장을 다니면서 연기를 하기는 힘드니 꼭 졸업 전에 해보기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다짐은 다짐일 뿐, 연기수업을 듣기 위해 거쳐야 하는 오디션 과정 때문에 매 학기 그럴듯한 핑계를 찾으며 수업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도 벌써 3년이 되어 이제는 졸업반이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해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절실함이 언제 사라질까 두려워 이를 악물고 그날 바로 오디션 신청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

신청을 했으니 오디션 준비에 돌입해야 했다. 일단 1분짜리 독백을 찾아야 하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고르기가 힘들었다.

나와 많이 다른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되어 내 나이 또래의 여자 학생을 중심으로 찾다 보니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러다 오디션을 할 수나 있을까 낙심 할 때쯤 눈에 뛰는 캐릭터를 하나 발견했다.

남편이 이혼을 원하자 이혼을 해줄 수 없다고 이혼서류를 먹어버리는, 그것도 캐첩에 찍어 먹는 억척스럽고 엽기적인 아줌마다. 나와는 거리가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았지만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신기하게도 낭독을 해보니 점점 이 여자의 생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이혼제안에 느낀 분노와 좌절을 억지로 삼켜버리고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할지 몰라 그녀의 불행한 부부사이를 상징하는 이혼서류를 무작정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냥 코메디라고 생각했던 나의 짧은 생각이 드러남과 동시에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어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드디어 오디션에 자신감이 생겼다.

나이, 직장, 가족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아줌마와 나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더 나아가 같은 여자이기에 내일 아침 8시, 나는 이혼서류를 캐첩에 찍어 먹는 4차원 아내가 되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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