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최정우 l 유리수 셈하는 어린이

2012-07-1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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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도서관. 익숙한 한국 말소리가 들렸다. 대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한국말은 반가운 법인데 이번 목소리 앞에서 내 마음은 불행히 못 그랬다.

40대 초 중반 정도 돼 보이는 한 여자가 10살 정도의 여자 아이를 붙잡고 산수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시끄럽다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몇이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곳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거나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만 혼자 누가 여자의 한국말을 알아들을까봐 눈치를 살폈다. 낯이 뜨거웠다.

답이 뭐라고? 또 틀렸잖아. 너는 유리수 덧셈 뺄셈 정말, 정말 못 해. 이 간단하고 기본적인 걸 왜 못 하는 거야. 머리가 나쁘면 옆에 적어가면서 풀기라도 하던지. 내일 아침부터 세 장씩 문제 더 풀어!


등 뒤로도 아이가 주눅이 든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말없이 엄마 이야기를 들으며 문제를 풀거나 답을 말 할 때도 모기만한 소리로 간신히, 자신없게 웅얼거렸다. 엄마가 자리를 떴을 때도 그랬다.

그 나이 또래가 가지기에 과한 집중력으로 문제를 푸는 데만 한참을 몰두했다. 아이를 붙잡아 매 놓은 것이 공부 욕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일은 쉬웠다. 엄마의 협박과 비난이 겁에 질리게 만들어 아이를 아이답지 않은 짓을 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그 아이가 태어난 몸과 마음의 모양새 그대로를 원래의 결대로 유지한 채 자라도록 하는 일이다.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싫어도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 타고난 결을 난도질하고 결국 아이가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도록 몰아치는 과정은 양육이 아닌 사육이다. 그 어떤 것도 아이가 ‘나는 귀하고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배워야 하는 것은 없다.

아이를 붙잡아 돌려 앉히고 함부로 말해줄 순 없었다. 그 따위 유리수 셈, 나는 대학 들어가자마자 까먹기 시작했지만 지금 엄청 행복하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그깟 계산이야 하다보면 천천히 알아서 느는 것이라고, 그걸 못하면 니 인생에 큰 일이 날 거라고 협박하는 어른들은 엄마를 포함해 다 나쁘다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귤 알맹이 하나만한 동근 어깨가 쪼글쪼글 구겨진 채 조용히 유리수 계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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