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일을 향해 뒷걸음질 치지 말라고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연어의 회귀(回歸)의 습성처럼,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 마음의 쪽배를 띄운다.
여든 셋이란 긴 세월을 흘러 내려온 그 강줄기의 구비구비에서 나는 바위를 감싸고 소용돌이 친 흐름도 있었고, 어떤 때는 미끄럼틀를 타고 내려오듯 한, 순탄하게 미끄러져 흘러 내려온 한 때도 있었던 것같다.
오늘 나는 내 인생의 종막 무대에 서서 뒤돌아 볼 때, 내가 걸어온 아동극 60년의 시발 점이 어쩌면 내 나이 8살 적인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잘못(?) 낀 첫 단추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거제도 장목심상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학예회 날, 교실 두 칸 사이의 칸막이를 헐고 만들어진 간이극장 무대에 섰던 나와, 학부형 대표로 찬조 출연한 아버지는 우뢰 같은 박수를 받았다.
나는 야마노 오사루상(산 속의 원숭이)이란 동극의 주인공인 원숭이 역할을 익살스럽게 해냈고, 아버지는 그 분의 십팔번인 ‘장타령’을 거지 분장까지 하고 멋지게 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추억의 뱃질은 이어 진다.
내가 통영중학 3학년 때, 그러니까 8.15 해방과 함께 내 고장 통영에서의 유일한 연극무대 극장인 봉래극장에서 나는 해방과 함께 밀려 온 수많은 극단의 연극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고 나를 그 세계로 끌어 들인 한 연극이 있었다면, 6.25 때 월북하여 이북의 문화부 장관 자리까지 오른 유명 연극배우 ‘황철’이 출연한 ‘태백산맥’이다.
그 연극에서 혁명가로 출연한 황철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연기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뇌리에 찍혀 있다. 그리고 눈물의 여왕 ‘전옥’이 출연한 ‘눈 내리는 밤’ 에서의 그녀의 눈물 연기를 보면서 나도 함께 울었다. 그리고 어느 악극단의 ‘홍도야 우지 마라’ 에 출연한 이름 모를 미남, 미녀 남매의 비정한 현실을 그린, 눈물의 연기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나는 그들이 연기한 바로 그 극장에서, 중학 4학년 때 나의 국어 선생이었던, 시인 김춘수 선생의 연출로 유치진 선생의 ‘조국’ 에 출연 했고, 대학입시를 코 앞에 둔 중학6학년 때는 ‘마의태자’ 를, 그리고 6.25 피난시절에는 중학시절의 국어 선생이었던 박재성 선생의 작품 ‘산비둘기’에 출연 하기도 했다.
한편 황철이 연기한 그런 스타일의 연극인 김진수 선생의 작품 ‘반역자’에 이어, 큰 적자로 우리 집 재산을 축낸 중국작가 조우의 ‘내우’가 내 고향 통영에서의 나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었다. 그리고 나는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위해 서울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 때부터 반세기가 훌쩍 흐른 지금, 그들과 내가 연기 했던 그 봉래극장은 헐리고 없어졌지만 그 극장 발코니에 올라서서 손님을 끌기 위해 불러 제끼던 악사들의 구슬픈 나팔 소리와, 내가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서울도 아닌 지방 도시인 통영에서 사내 자식이 4번이나 무용발표회를 열고, 또 연극에 미쳐 돌아가고 있을 때의 어느날 밤, 술에 취해 곤드래가 되어 밤 늦게 집에 돌아오셔서 화살맞은 늙은 사슴의 신음소리 같은 말투로 “이놈아, 애비 얼굴에 똥칠 작작하고, 내 눈 앞에서 꺼져라!” 라고 뇌이시던 슬픈 대사를 나는 지금껏 내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다.
아버지의 그러한 울부짖음은 그 날 밤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기수(아버지의 이름)야, 너의 큰놈 사람되기는 다 틀렸으니, 아예 딴따라 광대패로 내보내는 게 좋을꺼다!” 라는 비냥거림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여학교 선생질이란 말뚝에 묶어 두어 보았지만, 나는 끝내 그 밧줄을 끊고 서울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분의 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온 나의 남다른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내 고향 통영이 세워 주려는 나의 기념관 건립을 위한 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우리집 가보(家宝) 제1호 같이 느껴지는 한 권의 책자에 눈길이 머문다.
그 책자란 다름 아닌, 1953년 그러니까 내 나이 23살 때, 전국학생극극본현상 모집에 응모하여 입선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뮤지칼 ‘토끼전’의 원본인 것이다. 현상 모집에 응모한 작품은 절대로 돌려주는 법이 없는데, 어찌된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 원본이 내 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본이 내 손으로 되돌아 온 것이 어쩌면, 앞으로 세워질지도 모르는 내 기념관 전시장의 첫 자리에 놓여지기를 바랬던, 어떤 예시 같은게 아닐까 하는 추상적인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원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착의 본질적인 초점은 바로, 나의 연극행위를 그렇게도 말렸던 아버지께서 그 작품의 제본(製本)을 손수하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장목 초등학교에서의 학예회 때에 아버지와 내가 그 날의 주인공이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몸 속에 짙게 잠재되어 있던 예능적인 끼가, 자식인 내 몸 속으로 옮겨져 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날의 학예회에서, 과연 나의 진로에 대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던 것일까 하는 자문과 함께, 저 세상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지금의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는 궁금증도 가슴에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