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는 죽어서 말한다
콜롱베의 드골묘지, 그를 기리는 추모객 발길 끊이지 않아
드골(사진)의 고향 콜롱베.파리에서 완행기차로 3시간 간 후 다시 버스를 타고 40분 시골길을 달려야 하고 오후 3시 이후에는 그나마 버스가 끊어져 택시를 미리 예약해야 한다. 콜롱베는 샴페인으로 유명한 상파뉴 지방의 촌마을로 인구가 불과 650명이다.
프랑스의 자존심 드골은 마을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었다. 묘지 주변에는 그를 기리는 글이 새겨진 동판과 각국에서 보내온 기념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드골이 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훈장이나 감사장도 사후에 받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드골이 살던 집. 은퇴 대통령의 자택으로는 초라한 느낌이 든다.>
드골은 유언에서 가족장을 고집해 그가 죽었을 때 각료들은 콜롱베에 올 수가 없었다. 여러 면에서 유별난 장례식이었다. 그의 유해는 자동차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탱크에 실려 옮겨졌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탱크 여단장이었고 2차 대전 때는 독일의 롬멜 전차부대를 격파한 유일한 프랑스 기갑 사단장이다. 그리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프랑스 기갑여단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파리에 입성한 주인공이다. 탱크는 ‘드골 영광’의 상징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영국으로 피신해 “우리는 전투에서 졌을 뿐 입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며 프랑스인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호소했다. 파리에 입성해 수상에 오른 후에는 나치에 협조한 프랑스인들을 인정사정없이 처단했으며 특히 지성인은 용서하지 않았다.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프랑스가 다시 외국의 침입을 받을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이들은 엄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롱베 성당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드골. 흰 대리석의 드골 묘지는 너무나 평범하고 묘비에는 그의 유언대로 “샤를 드골, 1890-1970”이라고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묘지를 찾는 추모객은 매일 끊이지 않고 줄을 잇고 있다.>
드골은 보도에서도 공과 사를 분명히 해 개인생활은 일체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외에는 콜롱베 집을 드나들 수가 없었고 그래서 콜롱베는 신비의 드골 마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라 보아세리’로 불리는 그의 집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가 구경할 수 있지만 사진은 못 찍게 한다. 아래층 서재는 아담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좁았다.
흥미 있는 것은 드골의 집안에서의 몸가짐 자세다. 그는 집에서도 늘 정장 차림이었으며 식사시간을 1분도 어기지 않았고 떠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가족들이 모이면 그가 질문하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TV 뉴스를 본 뒤 목에 통증을 호소한 후 갑자기 숨졌다.
<콜롱베 마을 전경.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법석을 떨면서 마을을 재건축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골이다.>
콜롱베 마을 언덕에는 드골을 기념하여 프랑스의 상징인 로레인 십자가가 50미터 높이로 세워졌다. 이 십자가는 십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며 십자가 밑에는 드골이 2차 세계대전 때 런던에서 프랑스 국민에게 보낸 자유 메시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드골의 집에서부터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검소일색이고 국가예산이 낭비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은퇴하는 대통령이 살 집이라 하여 대규모 건축공사를 벌이고 기념공원 운운하며 마을을 재개발하는 등의 법석을 떠는 것은 콜롱베에서는 어색한 일이다. 드골이 이렇게 청렴함을 시범 보였기 때문에 드골 이후의 집권자 모두가 깨끗한 자세를 지녔다. 드골이 남겨 놓은 정신적 유산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몇천억을 축재해 다시 법정에 선 한국 대통령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드골을 기념하여 마을언덕에 세워진 50미터의 대형 십자가.>
프랑스를 핵무장 시킨 드골, NATO에서 프랑스를 탈퇴시킨 드골, 알제리의 독립을 도운 드골은 고집과 오만의 대명사였으나 그는 비전을 가진 청렴한 애국자였다. ‘위대한 프랑스’를 외친 드골을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