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낙엽의 사색

2006-12-20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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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생각

▶ 임경전 <의사/수필가>

금년 가을은 유난히 따뜻하고 길어 뒷뜰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밤새 비가 내린 후 나무에 매달린 잎새는 씻은 듯 깨끗하고 색상은 더욱 선명, 쭉쭉 하늘높이 솟아 있는 벗은 나무 사이로 비집고 흩어진 새벽햇살을 받아 반사된 것이 사방팔방으로 피어 나가면서 영롱한 여운을 보는 이의 가슴에 새겨주고 있다.
가을이 시작되면 연례행사로 나무 잎새들의 짧은 여정(旅程)이 시작되지만 나는 숲속 삼층 높이의 창가에 앉아 오륙층 높이로 솟아오른 아름드리 나무의 허리춤에서 난무하는 가을 잎의 운치를 즐기며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고 있다. 계절답지않게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니 나무에 매달려서 끝까지 망설이다가 떠날까 말까 망설이는 햄릿형 잎새, 결심이 선 듯 그러나 아쉬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형, 요리조리 비틀면서 떨어지는 과정(過程)도 내가 지켜보고 있는 창틀에 앉을까 말까 살짝 걸치는 듯 하다가 어디로 가야하나 쿼바디스 형.
세월아 네월아 언제가면 어떠리 발길 닿는 대로 물결 아름다운 곳으로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여유만만하게 떨어져 가는 김삿갓 형의 잎, 또는 바람이 불건 말건 망설임 없이, 흔들림 없이 직선으로 내려 와 땅에 얼굴을 파묻고 세상에 미련을 바리는 잎새 등등…
이렇듯 다양하게 윤무(輪舞)를 계속하며 이미 땅에 수없이 떨어져 있는 낙엽 더미 속으로 파묻히는 것이 운명임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체념한 듯 한해를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 대부분의 낙엽.
그러기에 옛 선비께서 ‘낙화(洛花)인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 고시조(古時調)로 남긴 뜻을 나 역시 아름답게 채색된 원경(遠景)도 좋지만 페루시안 융단처럼 아름답게 땅에 끝이 보이지 않게 깔려 있는 낙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 또한 편안함 그 자체다.
연이나 사려(思慮)깊은 옛 선비의 자연 감상법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엿보고 있는 것이다.
임경전 <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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