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칼럼
▶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과거사가 부끄러운 이야기라면 그 과거사를 들추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비를 부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떳떳하지 못한 과거사에 곧잘 매달린다. 덮어두기 억울하기에 파헤치는 게 아니면 한(恨)풀이가 분명하다.
과거의 실수나 과오를 떠올리고 지난날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일으켰던 그 기억들을 거듭 겪게 만드는 일이라서 부담이 따른다.
조선시대에 부관참시(副棺斬屍)라는 극형제도가 있었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던 이 악형은 연산시대에 성행했다.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잔인한 이 제도로 김종직, 정여창 등 수많은
사람들이 형벌을 당하였다. 세조 때 뛰어난 지모로 일세를 풍미했던 한명회도 죽은 후에 부관참시로 화를 당하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한 화풀이와 분풀이를 끊어내지 못하면 악순환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는 게 지옥일 수밖에 없다. 증오는 증오를 받는 사람보다는 증오하는 사람이 더 상처를 받는 법이다. 과거를 들추는 측이나 과거를 벗는 측이나 결국 얻는 게 없는데도 과거사에 집착하는 것은 인과의 법칙에도 반하는 일인 것이다. 상처로 얼룩진 과거사를 헤집는 건 폭력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우리를 벌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실은 자연에 있는 인과의 법칙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벌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스스로 정신적인 속박을 짓고 산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산다는 자체가 실수나 과오 투성이 이기에 인간이 인간을 탓할 수 없다는 얘기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죄인을 치라고 외친 예수는 일흔 번의 일곱 배를 용서하라고 했다. 인간사에 있어 용서는 건강과 발전의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덕목이다. 그것은 생명력이 건전하게 구현될 수 있게끔 생명력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신을 청소하는 일이다. 타인의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용서의 힘이다. 참된 용서란 완전히 지워버린 다음에 깨끗한 바탕 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란 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인생도 구름처럼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가버린 세월 속에 못 다한 아쉬움 아니면 후회가 남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어떤 경우일지라도 아픈 데를 건드리는 건 위험을 수반한다. 수많은 사연들이 쌓여있는 과거사를 들추고 쑤시는 건 상처를 더 깊게 파는 인정사정 없는 일로 매도되기 쉽다. 과거를 청산하려면 용서라는 무기로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잘라내야 한다.
깨끗하게 용서해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과거 청산 문제는
다람쥐 쳇바퀴가 되고 싶다. 솔로몬의 지혜를 빌리면 내가 얻은 모든 것으로 이해를 얻어내는 것이다. 내가 용서를 받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게 진정한 과거청산이다. 과거를 과거답게 넘기는 유일한 수단은 용서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청산 못할 것, 용서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문무일/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