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며 사는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
자족이란 언제나 만족한 상태로 스스로를 채우며 여유와 넉넉함을 가지고 감사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 부러운 대상이 사람 따라 다르고 또 부러워하는 내용이 여러 가지겠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자족한 일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 부럽다. 그의 옥중서신 빌립보서 4장1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부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참으로 인생을 도통한 노 사도다운 멋진 고백이다.
그 많던 권세와 학문과 가문도 분토처럼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부귀 앞에 타락하지 않고 가난 때문에 변심하지 않았으며 권력과 무력 앞에 비굴하지 않았던 그 일생이 부럽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버리고 떠났으면서 소돔 고무라 성을 롯의 아내처럼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현대는 감각적 향락주의 문명 속에 살기 때문에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기가 쉽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네 불행과 비극이 대개는 그릇된 행복관과 그 추구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주위에는 스스로의 노력을 접어두고 금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과 알고 지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그런 사람을 알고 지내므로 조금이라도 덕을 보아 힘 안들이고 생활을 해볼까 하는 마음에서 라지만 대개는 덕을 보기는커녕 실망을 안겨 받았다고 투덜댄다. 그리고 부질없이 사회와 시대와 환경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한숨 쉬는 사람도 본다.
재래도 현명한 사람은 공연한 불행 밑에 서려고 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불행에 대해서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력을 3%밖에 지니지 못했다가 사실상 장님이 되어 온갖 고통과 시련을 신앙심으로 딛고 일어나 끝내는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교수가 된 피트 페이지 박사의 이야기를 최근에 읽었다. 어느날 그도 핸디캡인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교수님, 눈먼 사람하고 귀머거리, 벙어리하고, 팔 하나 없는 사람하고, 또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 중에서 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불행한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랬더니 한동안 침묵하고 나서 그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마디 마디 힘을 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불행한 조건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니다. 가장 불리한 조건이 되는 것은 무기력한 것과 무책임한 것과 용기가 없는 것과 내일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자족(만족) 못하는 사람이다.”
박석규/은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