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나이 일흔에는…

2006-09-0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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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와 관련된 우스개 소리 중에 이런 게 있다. 즉, 나이 들어 은퇴하면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로부터 초빙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선택한 학교에 따라 노후가 좌우된다고 한다. 동경(?)대를 가면 동네 경로당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되고, 하바드(?) 대를 가면 하는 일 없이 바깥만 들락거리게 되니, 제일 좋은 곳은 바로 예일(?) 대라는데… 이유인즉슨, 예순이 넘어서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젊은 세대에게는 재미난 농담 정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중년을 넘어선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최근 20년 동안 한국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고령 비율)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8%를 넘어선 수준이다. 인구학에서는 전체 인구에서 고령인구의 비율이 7%가 넘어서면 ‘고령화 사회’, 14%를 넘으면 ‘고령 사회’, 그리고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라고 부른다. 한국의 고령 인구는 2000년에 34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2%를 넘으면서 이미 ‘고령화 사회’에 들어섰다. 2018년에는 이 수치가 14%를 넘어 ‘고령 사회’가 되며, 2026년에는 20%를 넘어 인구 5명중 1명이 노인이 되는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직 한국의 노령인구는 세계적으로 볼 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넘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게 된다. 프랑스는 115년, 독일이나 미국은 40~70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의 경우 24년이 걸렸다. 과연 한국은 얼마나 걸릴 것인가? 앞서 언급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18년(2000년~2018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예상 수치일 뿐이며 출산율이나 평균수명에 따라 약간의 변동폭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략 20년 안팎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거의 확실하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이다.
노인들이 겪는 문제는 크게 역할의 상실, 가난, 고독, 그리고 건강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역할의 상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현재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는데 정년은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이다. 아니 실제로는 정년이 더 단축되는 추세이다. 결국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보내는 여생이 그만큼 길어지게 되는 셈이다. 산업화, 자동화, 정보화가 진행될 수록 노인들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고, 사람들은 더 빨리 노인으로 내몰리게 된다.
역할의 상실은 두 번째 문제인 가난, 즉 경제적인 문제와도 직결된다. 한국에서는 그나마 모아둔 돈이나 퇴직금을 자녀의 결혼 비용으로 써버리기 일 쑤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노후를 위해 따로 돈을 모으는 사람들보다는 아무 준비없이 노후를 맞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 싶다.
18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아 상실에서 비롯된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노인의 우울증은 젊은이 보다 더 쉽게 마음의 병이 될 수 있고, 이는 신체적 건강의 문제로 직결 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제 때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더 악화된다. 결국 이러한 의료비용을 개인이 아닌 국가가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감당하고자 할 때 고령 사회가 갖게 되는 큰 사회적 부담이 생기게 된다.
70이란 나이가 나한테만큼은 결코 다가오지 않을 먼 훗날의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70이 되었을 때 내 주변 세대들이 대부분 살아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노인 비율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때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가령 지하철에 경로석이 따로 있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나와 시대를 같이한 정겨운 형제 자매들이, 친구들이 나의 바램처럼 다들 행복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때를 대비해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또 국가는 ‘우리의 일흔’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우리의 일흔’은 국가만의 고민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일흔’ 전에 당장 나의 일흔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 일’로서 관심을 갖고, 다같이 사회의 고령화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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