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나의 큰 형님은 북경 근교의 광업 회사에 입사하신 후 해방이 되었지만 그 때 정황이 여의치 않아 귀향하지 못한 채 지금은 중국 길림성의 소련, 북한이 맞닿는 삼각지역에 있는 훈춘시에 살고 계시기에 내 나이 6살에 헤어진 형님이시지만 사별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뵙고 싶은 막내 동생의 정분에 2001년이래 여섯 번을 다녀왔다.
겨울이면 섭씨 영하 40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간다기에 그 얼마나 추운 곳에 사시는가 향수심에 젖어 사는 형님을 생각하면서 2003년에는 겨울에 다녀오기로 했는데 그 때는 영하 35도의 추위였다.
서울에서 조선 민족 자치주의 본산인 연길까지 비행기로 가서 차를 타고 도문(탈북자 수용소가 있는 곳)을 거쳐 훈춘에 이른다. 옛날에는 백두산과 장백산맥을 연결하는 중국 땅 서쪽을 서간도라고 하고 백두산 동쪽지역을 북간도라고 호칭했는데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 운위하면서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려 하고,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탈북자가 오가는 두만강 이북 지역이기도 하다. 연길에서 도문시를 지나 훈춘으로 가는 일부 길이 두만강 곁을 지나간다.
한 많고 피어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두만강. 강이 결빙되는 겨울이나 날씨가 가물고 강물이 많지 않을 때는 내복 바람에 건널 수 있는 곳도 있기에 철조망을 치고 국경 경비가 삼엄한 북만 국경이라는 선입견을 저버리면서 두만강 가에 서서 옛 생각에 젖어 나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1880년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매킨 다이어와 존 로드와 함께 서상훈, 이흥찬 등이 단권 복음서를 번역하고 먼서 저상윤이 권서인으로 두만강을 건너 고향인 송천(松川/송내) 지역에 복음의 터전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송천 교회를 설립하고 각지를 순방하며 전도하기 위해 오고 간 두만강.
천주교와 개신교가 중국으로부터 복음의 물줄기가 흘러 넘치면서 순교의 피를 뿌렸던, 건널목이었던 두만강.
왜놈들의 수탈과 미등기 농지의 약탈 등으로 생업을 잃은 빈약한 농민이 남부여대 살 길 찾아 이국 땅 북간도에 눈물 흘리며 건넜던 두만강.
왜놈에 찬탈된 국가독립과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순국의 피가 흘러간 두만강.
독립 전쟁의 전초 기지였던 북간도, 중경과 상해의 애국 투사와 연계하며 싸우다 순국한 우리들의 선현들이 건넜던 두만강.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격살한 안중근 의사. 1909년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11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시고 하늘과 땅에 맹세한 안중근 의사들의 결의 찬 기틀을 두만강을 건너가면서 새로운 민족혼을 뜨거운 가슴에 불태웠던 순국선열.
잃어버린 조국 땅을 뒤로하고 두만강에 피를 뿌리고 흘러간 민족혼의 격전지 두만강. 왜군과 왜경에 피살된 애국지사를 생각하면서 흘린 눈물 자국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이는 나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연화(正然化) 함이 아니고 우리 선배들의 그 빛나는 발자취에 흔적을 더듬어 보는 것이요, 오늘날 생활 속에 참된 삶을 추구한다면서 인간 정도나 신앙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부적절한 자기 행동의 합리화를 꾀하고 죄와 부정불의와 타협하며 정당화하는 먼저 많은 사이비 신앙인들 앞에 무엇을 위해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독립 투사들은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신앙과 정론을 지켜왔는고. 그리고 그 숭고한 신앙 유산을 오늘에 많지 않은 후배들에게 물려주신 것인가를 재고하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선교 120년에 이르는 이 시점에서 희생과 봉사 위에 기독교 사상과 문화 창달은 영원히 빛날 것인가? 순교한 신앙의 선배들과 국가와 민족혼의 회복을 위해 먼저 가신 영현들을 추모하며 애도를 드린다.
기독교 정신과 민족애. 누가 이 위대한 유산을 계승할 것인가.
고대진 <장로,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