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뽀삐와의 추억

2006-07-20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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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배우며

▶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뽀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4년 전 1992년 늦은 봄이다. 늘 즐거움을 주던 작은딸마저 대학에 가고 보니 갑자기 적막강산이 된 듯 외로움이 밀려왔다. “언니 강아지 한 마리가 생겼는데 길러보지 않겠어?” 어느 날 동생의 전화다. 난 잠시 망설이면서 “그래, 내가 길러 볼께” 황급히 동생네 집으로 달려갔다. 하얀 털을 가진 8파운드의 몸매, 둥근 공처럼 털을 깎아주지 않아 완전 털보에다 까만 눈만 빠끔 나를 응시한다. 이름은 뽀삐, 생후 1개월이란다.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던 나, 중년의 갱년기 위기를 달래듯 뽀삐를 품에 안고 와 한가족이 되었다. 이발하고 목욕하고 나니 완전 움직이는 인형이다.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건 아예 내 사전에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한 침대에서, 어떤 때는 내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보며 정이란 이렇게 무서운 거다, 꼭 내 자식 같다.
새벽이면 뽀삐를 앞세우고 산책을 나설라치면 좋아라 깡충깡충 뛰며 힐금힐금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음 지어준다. 거짓말 한다고요? 강아지도 기분이 좋으면 웃는 것을 모르는군요. 비가 오는 날이면 방안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나는 숨고 뽀삐는 신이 나서 위층, 아래층, 지하실로 나를 찾으러 헤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움찔 놀라 흑진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똑 바로 응시하던 즐거웠던 그 순간들! 한번은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었다. 용감하게도 조그마한 녀석이 겁도 없이 끈질기게 악을 쓰며 짖어대어 도둑을 쫓아 내 변을 면케 한 기특하고 장한 뽀삐였다.
8년 전 어느 날 뽀삐의 눈에 큰 이상이 생겼다. 다행히도 눈물샘이 막힌 것을 발견, 침샘을 눈으로 연결하는 수술에 성공, 초롱초롱한 맑은 눈으로 회복됐다. 얼마나 기뻤던가. 그러나 밥을 먹을 때는 침샘이 눈으로 연결되어 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먹는데 얼마나 불편했을까. 곁에서 지키고 있다가 눈물을 닦아주곤 했었다. 눈을 수술 후에는 강한 강아지 샴푸 대신 아기들 샴푸로 목욕시키고 전용미용사로 각별한 사랑을 주고받았던 귀염둥이 나의 뽀삐. 하필이면 나의 짧은 고국 나들이 동안에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미시간, 뉴욕, 보스턴 등지로 오가며 13년 반을 함께 한 수많은 추억들이 나를 이렇게 울보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뽀삐.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뽀삐의 텅 빈 자리가 이렇게 가슴아프게 클 줄이야, 너무 안타깝구나. 언제 너를 잊을 수 있겠니. 사랑하는 뽀삐야, 정말 보고 싶다.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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