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방과 장기판

2006-06-28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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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생각

▶ 서공렬 <콜럼비아, MD>

이웃간에 내남없이 살던 60년대 우리집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동네 사랑방을 거처하였다. 농촌의 사랑방은 놀고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이웃끼리 품앗이를 맞추기도 하며, 동절기나 궂은 날이면 새끼 꼬기, 가마니 치기, 멍석 엮기 등 가욋일도 하였고, 고참 장정들이 나이 어린 꼬마둥이들에게 농사기술을 비롯해 성교육에 이르기까지 각종 손놀림새와 생활의 지혜를 전수해 주는 교육장이기도 했다. 설날이면 노인들을 모시고 합동으로 세배를 드리기도 하고, 가끔씩은 이장님이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대사를 논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사랑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농사일에 찌든 젊은이들(그중 상당수는 머슴들)이 놀고 떠들며 요즘말로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손버릇 나쁜 일부 젊은이들이 화투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동네 어른들로부터 못쓰는 짓이라고 나무람을 당한 후 우리집 사랑방에서 화투장은 사라졌다. 어른들의 말 한마디가 단단히 영이 서있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닭서리, 보리서리, 수박서리, 날콩서리, 배서리, 곶감서리 등 특수절도 음모가 여기서 꾸며졌으며, 동네 제삿날, 잔칫날 정보는 빠짐없이 수집되었고, 급조된 밤참조달 특공대가 파견되기도 했다. 이도 저도 건수가 안 걸리는 날은 대개 막걸리 내기나 국수내기 장기판이 벌어지곤 했다.
장기는 두는 맛보다 거드는 맛이라 했던가. 걸쭉한 음담을 섞어가며 장기를 두노라면 두는 사람보다 으레 훈수꾼이 더 열을 올리게 마련인데, 그러다가 내기가 좀 커지면 자칫 과도한(?) 훈수 때문에 쌈이 벌어지기도 했다. 뭐 헐 놈, 못 헐 놈 하며 일단 걸쭉한 육두문자가 오가다가 우당탕 육박전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얼마 안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장기판은 이어졌는데, 좀 유리한 측에서 “인자부터 훈수들면 없어!”하고 으름장을 놓을라치면 사뭇 전운이 감돌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 장기판이 애 못 낳는 아낙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데 그 사연인즉 이렇다. 젊고 혈기왕성한 머슴들이 장기를 두다가 참았던 오줌을 누고는 쓰윽 추스리는 사이 약간의 오줌이 손에 묻고, 요즘처럼 수도가 붙어있는 화장실이 아니라 측간에 불과했을 것이니, 손을 씻을 리가 없고, 손에 묻은 오줌은 그대로 장기판에 옮겨 묻어 오래 묵은 장기판은 대개 지리퀴퀴한 냄새가 나게 마련이었다. 이런 연유로 애 못 낳는 아낙들이 사랑방 장기판을 고아 먹으면 젊은 머슴총각들 정기 덕으로 수태를 한다 했던가.
애환과 낭만이 공존하던 옛날 사랑방, 요즘 농촌에서 하마 찾을 수 있을까. 우리집 사랑방에 있던 손때가 묻다 못해 거무튀튀한 그 장기판은 어느 아낙이 갖다 삶아 먹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서공렬 <콜럼비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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