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다리는 여유

2006-05-28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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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배우며

▶ 권영은/워싱턴 문인회

나뭇잎들이 부드러운 저녁햇살에 반짝이는 주말, 길섶의 작은 봄꽃들처럼 행복한 모습을 산책길에 보았다. 두 살 남짓 된 여자아이는 뒤뚱거리며 걷던 걸음을 멈추고 길 위에 앉아서 흙장난을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흙놀이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흙 묻은 손을 옷에다 대충 닦으며 아이는 일어나 제가 타고 왔을지 싶은 유모차를 밀면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아이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어른 두 사람도 천천히 따라 걷는다. 재촉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옷에 흙을 묻혔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자연 속에서 부모와 함께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 아이는 분명 행복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린 간혹 성급하기도 하며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뱃속의 아기가 빨리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우유를 잘 먹고 쑥쑥 자라서 첫 예방주사를 맞히러 소아과에 갔을 때 아기의 몸무게와 키가 만나는 점이 그래프 꼭대기쯤에 찍히기를 기대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말을 빨리 시작하고 또래들보다 먼저 걷기를 바란다. 기저귀도 얼른 떼고 글도 남보다 일찍 읽기를 기대한다. 누구나 한번쯤 내 아이가 혹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고 보통아이로 자란다.
말을 남보다 늦게 시작하면 어떻고 글읽기가 조금 더디면 어떤가. 어려서 학교공부 좀 못 한다고 아이가 영영 낙제생이 되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요즘은 천재를 못 알아보는 세상도 아니다. 서둘러 가르치고 앞서가라 밀지 않아도 아이들은 타고난 특성과 능력, 그리고 주위의 관심과 사랑으로 성장하여 때가 이르면 제 나름대로의 몫을 하게 되어있다.
덤불 속에서 튀어나오는 토끼를 따라다니고, 조그마한 제 손바닥 위에 애벌레를 올려놓고 간지럽다고 깔깔대기도 하고, 둥지 속 갓 깨어난 어린 새들이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입 크게 벌려 받아먹는 모습을 보며 땅거미 지도록 밖에서 놀기를 좋아하던 우리집 둘째는 1학년 때 수학시험에서 영점을 받아온 적이 있었다. 야단은커녕 아무나 빵점 받는 거 아니라고 외할아버지께 오히려 칭찬까지 들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지금은 그리 뛰어날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긴 머리 소녀다.
과거엔 지식이었지만 요즘에 와서는 상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세상을 살면서 아이들에게 지식을 넣어주는 일이 부모의 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가 중학교에만 들어가도 부모로서의 자격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 이상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부모가 실제로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집 부모보다 배운 것이 적어서 부모노릇을 잘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영어가 부족해서 아이가 부모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 할머니들은 글을 몰라도 훌륭한 어머니셨고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지혜롭고 당당한 어른들이셨다.
옆집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하지 말자. 형제끼리도 말자. 내가 원하는 아이로 만들려고 하지 말자. 나의 생각을 아이에게 넣어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부족한 아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존중해 주자.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려 하지 말고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로 기다려 주자.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때는 최선을 다 해주자.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이가 한 사람의 건전한 시민으로 커가고 있는가를 지켜봐 주자.
권영은/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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