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명했던 초기 지도자들

2006-04-2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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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언대

▶ 김지수 /한미교육재단이사

100년 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참상과 당시 가혹한 차별을 받던 중국인들의 실상에 관한 한국일보 박록 주필의 ‘지진보다 무서운 것’이란 칼럼을 읽으며 당시 한인사회 초기 지도자들을 생각했다. 그때 미국은 중국인 배척법이란 전대미문의 악법을 만들어 차별하였다. 당시 우리의 처지는 중국보다 더 처참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기화로 을사보호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간계를 꾸미게 된다. 당시 한인은 인명피해는 없고 약간의 재산피해를 보았을 뿐인데도 샌프란시스코 일본 영사가 통감부에 한국인 24명 사망, 부상 80명, 재산피해도 상당 등으로 허위 보고하였고 통감부는 이를 토대로 광무황제(고종)로부터 하사금을 받아서 일본 영사를 통하여 한인에게 분배하려고 했다. 한국 정부와 재미 한인이 결과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인정하게 한다는 계략이다.
당시 의연금을 모집하던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이와 같은 음모를 알게 된 재미 한인들은 공립협회 회장 송석준 명의로 광무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일본 영사를 통한 구휼하사금은 우리의 당당한 자유의 기상을 보전키 위하여 수령을 거부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도 통고문을 보내어 일본이 자국 영사를 통하여 구휼금을 분배하여 우리의 마음을 사려는 것은 굶어 죽을지언정 거절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광무황제의 하사금 1,900달러는 선교사를 통하여, 대한매일신보의 의연금 592달러는 전임 명예영사를 통하여 분배받아 공립협회 재건과 공립신보 재간에 요긴하게 쓰여졌다.
한일합방 후인 1913년 남가주 살구농장 취업 한국인 12명이 당시 동양인 배척 분위기에 따라 동네 농장인부들에 의하여 추방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일본 영사는 재미 한인이 자국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국민 보호를 내세워 미국 정부에 항의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피해 한인들에게도 보상을 받게 하여 주겠다고 하자 이들은 이를 단연코 거부하고 공립협회가 발전하여 설립된 대한인 국민회에 이를 보고하였다.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이대위는 미 국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재미 한인은 한일합방 이전에 도미한 사람들로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일본의 간섭을 거부하니 한인에 관한 사항은 한인사회에 교섭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국무장관은 이를 수락하였고 이로써 국민회는 재미 한인의 정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우국 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망명학생 신분으로 도미할 수 있었고 이들은 재미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독도를 차지하려는 일본의 계산된 행동을 보면서 100년 전 일본의 계략을 보기 좋게 퇴치한 재미 한인 지도자들에게 감사 드리며 앞으로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현명한 지도자의 탄생을 기대하여 본다.
김지수 /한미교육재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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