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요칼럼] 고통이 감사가 된 순례길

2026-05-12 (화) 12:00:00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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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나선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순례는 출발선에서 시작된다고 알았지만, 그 길에 도착도 전에 시작되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날, 공항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 견디기 힘든 통증을 안고 생판 모르는 길 위에 섰다. 마드리드의 한 병원 응급실로 가서 부분 마취로 진통을 잠재우고 부러진 뼈를 맞추어 깁스(Cast)했다. 깁스는 무겁게 단단히 굳어졌고, 진통제는 여덟 시간마다 나를 겨우 현실에 붙들어 두었다. 도착한 하루를 병원 신세 지며 보내고, 밤11시가 다 되어 호텔로 들어와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날을 샜다.

남편과 나는 5년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갑자기 닥쳐온 뇌졸증과 심장 이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남편의 건강은 호전되었고, 심장에 페이스 메이커를 한 후로는 등산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어느덧 이민 생활도 반세기가 되었고, 우리의 금혼을 맞았다. 이 특별한 기념일을 맞아 버킷리스트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팀에 동참하기로 했다.


생장(Saint-Jean-Pied-de-Port)에서 까미노(Camino) 순례 여권을 만들고 시작한 순례길 첫날, 오리손 산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다. 산 중턱에 내려앉은 운무는 마치 신선이 내려올 듯 신비롭고 한 폭의 그림 같다. 소와 말들이 거니는 산을 오르는 길이라 숨이 턱까지 걸린다. 깁스 안에 갇힌 손목의 통증은 걸음마다 작은 종처럼 울리지만, 순례길은 멈출 수 없었다. 내 짐까지 진 남편은 무거운 배낭이 왼쪽 가슴의 페이스메이커 자리를 짓눌러 끈을 두 손으로 붙잡고 두 사람의 삶을 지고 걷는다. 하늘에 흰 구름 흘러가듯 천천히 세상을 앞으로 밀어내지 않고 세상이 나에게 다가오게 걷다 보니 팀에서 점점 뒤로 처진다.

앞만 보고 쉼 없이 경주하듯 살아온 우리의 삶,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우리의 순례길은 두 부상병이 서로 밀어주고 붙들어주며 걸었다. 급한 성격에 오래 기다리지 못하는 나는, 천천히 한 걸음씩 세며 뒤따라오는 남편을 격려의 전파로 엮어 끓었디. 걷다가 기다리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인내로 호흡을 맞추었다. 우리의 느린 걸음은 파란 산등성에서 풀을 뜯는 소와 말의 천진한 눈짓, 하늘을 가로지르는 솜털 구름의 그림자, 검붉은 낙엽에 쌓인 길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 마을의 술 익는 냄새, 등을 만끽하게 했다. 나를 스쳐 지나는 순례자들과의“부엔 까미노” 따뜻한 격려의 인사, 친절한 카페 주인들과 순례 도장을 오래 간직할 것 같다.

순례길 동안 우리 짐을 들어준 팀원, 화장실에 쫓아와 내 바지를 올려주었던 팀원과 시애틀에서 왔다는 60대 여인의 손길을 잊을 수 없다. 인생은 혼자서 완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도우며 사는 존재라는 말이 맞다. 손목을 다치지 않았다면 보지도, 느낄 수도, 깨닫지도 못했을 것들이다.

종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대 성당 광장에 왔다. 온몸과 마음을 쏟아 낸 듯,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섰다. 지금까지 모든 역경을 견디고 걸어온 길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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