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이 만든 시간…바뇨 비뇨니와 사투르니아 온천

2026-05-01 (금) 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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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만든 시간…바뇨 비뇨니와 사투르니아 온천

계단을 타고 흐르는 물, 시간은 내려간다 - 사투르니아

토스카나를 여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는 도시보다 물이 더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언덕 위의 중세 도시와 성벽, 르네상스 미술관과 교회들이 이 땅의 얼굴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존재해 온 것은 땅속에서 솟아나는 온천수였다.

토스카나 남부에는 그 물의 시간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주는 두 곳이 있다. 발도르차 언덕 사이의 바뇨 비뇨니, 그리고 사투르니아의 카스카테 델 물리노. 같은 물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


물이 만든 시간…바뇨 비뇨니와 사투르니아 온천

광장 대신 물이 놓인 자리, 시간은 머문다 - 바뇨 비뇨니



바뇨 비뇨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광장이다. 이곳에서는 광장 대신, 거대한 온천이 중심에 놓여 있다. 돌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수조에서 따뜻한 물이 조용히 김을 올리고, 오래된 석조 건물들은 그 물을 둘러싸듯 서 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온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온천은 로마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고, 중세에는 교황과 귀족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물속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들은 물 안이 아니라, 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온천은 변함없이 김을 올리고, 돌벽과 창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물을 바라본다.

이곳의 온천은 몸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시간을 위한 장소처럼 느껴진다. 뜨거운 물은 수백 년 전과 같은 온도로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그 앞을 조용히 지나간다. 그리고 만약 그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싶다면, 광장 바로 옆에 있는 호텔로 향하면 된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이 오래된 온기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사투르니아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 끝에서 갑자기 시야가 열리고, 하얀 석회암 계단 위로 푸른 온천수가 층층이 흐른다. 자연이 만든 웅덩이마다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물에 몸을 맡기고, 누군가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작은 폭포는 어깨를 두드리고, 물은 끊임없이 흘러 자리를 바꾼다.

이곳의 온천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흐른 물이 스스로 만든 구조다. 온천 옆에는 오래된 물레방앗간이 서 있고, 물은 그 곁을 지나 다시 아래로 흘러간다. 물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이 섞이며, 풍경은 하나의 살아 있는 장면이 된다.

바뇨 비뇨니에서는 물이 머물고, 사투르니아에서는 물이 흐른다. 하나는 시간을 붙잡고 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나 두 곳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 물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로마 시대의 사람들도 이 물을 찾았고, 중세의 순례자들도 이 물을 지나갔으며, 오늘의 여행자들도 같은 온도의 물속에 몸을 담근다.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물이다. 그리고 그 물 속에서, 사람은 잠시 멈춘다. 생각이 멈추자, 몸이 그 온기를 기억한다. 토스카나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스며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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