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취향대로 음악을 골라 들을 수 있는 풍요의 시대지만, 나의 젊은 시절에는 앨범 재킷과 바늘을 올려놓는 낭만 서린 LP 레코드나 매끈한 CD가 아니고는 음악을 감상할 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음악이 담긴 그릇도 변해갔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LP 레코드 시절에서 매끈한 CD(Compact Disc)로, 그다음에는 컴퓨터 파일 형태의 USB와 MP3를 거쳐, 이제는 물리적인 저장 매체 없이 스트리밍을 통해 클릭 한번이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음악을 유독 좋아했던 나는 40여 년 전, 이민 가방 속에 무엇보다 먼저 LP 판과 CD를 챙겼다. 가곡과 팝송, 클래식, 그리고 오페라 전집에 이르기까지 장르별로 빼곡히 챙겨 넣고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시작된 이민 초기의 음악 감상은 그야말로 사치에 불과했다.
생존을 위해 휴일도 없이 줄달음질 치다 보니 그토록 사랑하던 음악을 접할 수가 없었다.
음악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있는 듯하다. 또한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자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다.
때로는 백마디의 위로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단 몇 분의 선율이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어 메마른 눈가를 적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울고 싶을 때나 기쁨으로 소리치고 싶을 때 음악은 가장 든든한 대역이 되기도 한다. 구름이 잔뜩 드리운 하늘 탓인지 마음마저 회색빛으로 물드는 날, 빈집에서 반려견 순이와 눈길을 맞추다 음악을 튼다. 이런 날엔 경쾌한 곡이 좋겠지, 40여 년 전 나의 젊은 날에 열광했던 아바(ABBA)를 불러낸다.
마침 맑은 피아노와 기타 전주와 함께 아바의 ‘치키티타(Chiquitita)’가 흐른다. 마치 어제 듣던 노래인 양 생생하게 다가오는 선율 앞에 음악은 타임머신이 되어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던 기억들을 단숨에 현재로 소환해 버리며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1979년, 이 노래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는 20대의 청춘이었다. 그 시절 나에게 이 곡은 그저 흥겨운 팝송으로만 느껴졌으나,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이 노래가 1979년 ‘유니세프(UNICEF)’ 자선 콘서트에서 처음 발표된 곡이라는 점이다.
불우 아동을 돕기 위한 곡으로 아바(ABBA)는 이 곡의 저작권료 수익 절반을 유니세프에 기부했다고 한다. 그 수익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고 한다.
불우 아동을 위한 그 따뜻한 마음이 선율에 배어있기 때문일까. 긴 세월이 지나 다시 듣는 지금, 더 깊은 감동으로 나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된다. 지금의 ‘Chiquitita’는 긴 세월 세상을 버텨낸 나를 찾아와 조용히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는 오랜 친구처럼 느껴진다. 가장 순수했고 또 가장 치열했던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누군가 음악을 일러 ‘감정의 속기사’라 했던가.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표라는 기호로 기록하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멜로디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나의 심장을 뛰게 하고, 낯선 이국의 언어가 마치 나의 사연인 양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이야말로 음악이 가진 위대한 공감의 힘일 것이다.
그 선율의 어깨에 기대어 가슴 속 묵혀둔 우리의 눈물을 흘려보자. “너의 부러진 날개를 고치고 다시 날 수 있게 하겠다”는 그 노래 가사처럼, 나의 지친 날개를 어루만져 주는 ‘Chiquitita’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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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