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를 맞이하고 벌써 두 주일이 지났다. 세월의 허무가 짙게 느껴온다. 올해부턴 시(詩)에 묻혀 살고 싶다. 지금까지 엉뚱한 세상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허탈감이 젖어온다. 아무리 ‘나'라는 존재를 규명해보려 해도 정체를 밝힐 길이 없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포함 모든 것이 시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거나 ‘인연'이 있어 세상 우주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선지식들이 주장해 왔지만 나는 그러한 말씀이나 인연들에 앞서 무위자연(無爲自然), 시가 있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싶다. 어차피 모든 것이 기적일 수도, 기적이 아닐 수도 있는 무한의 의문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 모든 것들을 시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대폭발이나 블랙홀 이론이 우세했지만 그 이전의 근거를 시에다 귀착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불덩이(해)가 망망 무한공간에 영원히 떠 있는 것…,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장엄한 일갈을 이루고 있는 것 자체가 한편의 찬란한 서사시가 아니란 말인가. 불멸의 화가 반 고흐가 멀고 먼 하늘의 별들, 거기에 자신의 꿈이 있다고 그림을 그렸듯이, 하이든이 ‘천지창조'(오라토리오)를 작곡했듯이, 그리고 안토니오 비발디가 천체 순환의 경이(Four Seasons)를 작곡했듯 나도 올해에는 감히 시계(詩界)를 탐험해 보려는 것이다.
새해 들어 시라는 출발선에 자세를 잡으려니 알 수 없는 경외감과 흥분이 밀려온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의 삶이 비좁고 따분한 곳에 천착해 온 것 같은 유감도 따라 붙는다. 해가 거듭할수록 한계를 느끼며 정치니 경제니 사회정의니 불합리 따위들에만 매달려 부심하는 것에 회의가 들어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어느 선배가 한잔 술에 취해 노래했던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단숨에 외워 읊었고, 조선 중기 장만의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馬)을 사니, 구절양장에 말도곤 어려웨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논밭이나 갈리라"란 서정시를 즐기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도연명, 이태백, 두보의 시를 한동안 즐겨 읽기도 했으나 젊은 탓인지 서양시인들의 낭만주의 시에 빠져 들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알프레드 데니슨 등등의 시들을 읽었던 감회가 새롭다.
장 콕도의 “내 키는 하나의 조개껍질,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라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정(情) 남기고 사랑 남긴 그곳, 영혼 한구석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 이 단시는 영영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일본 하이쿠(俳句)의 대표시인, 마쓰오 바쇼시가 좋아해도 이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고려말 이성계의 혁명 때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에 더하여 정몽주 어머니인 백학부인의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시를 통한 대화 기록은 우리 민족의 DNA가 얼마나 문학소질이 풍부한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고교시절 유치환의 시 ‘행복'을 읽고 야릇한 유혹과 아련함에 잠겼던 기억도 때때로 살아난다. 정지용의 ‘향수'라든가 김소월, 김영랑, 노천명 등등의 시들은 내 젊음과 낭만을 더해주는 원천이었다. 정치 삼엄했던 분위기에서 김지하가 쓴 담시(풍자시) ‘오적’,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읽으며 함께 외쳤고 같이 울었다.
시(詩)는 우주와 역사의 모든 것이다. 나는 내가 발행하던 <한민신보>에 가명으로 종종 구색을 맞추려고 시를 쓴 적은 있지만 전념한 적이 없다.
시는 영혼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진정성이 없고 위선, 교만, 허영 냄새가 나는 글은 뒷맛이 역겹다. 장황한 논리나 이론이 따라 붙지 않고 정직 겸손이 어우러져 진정성 넘치는 영감, 순수성 넘치는 시를 읽으면 정감이 느껴지고 감동이 오래간다.
국제 팬클럽 회원 서윤석 시인의 작품을 애독한다. 우리 동포들이 사는 곳, 국내외에는 시, 문학동호회가 활발하게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리움, 외로움, 기다림 그런 시 소재가 풍부한 환경에 더하여 정 많고 눈물 많고 로맨틱한 민족이니 세계 도처에서 우리 문학이 꽃피고 있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리라.
올해에는 시와 음악에 묻혀 지내도록 노력해 볼 작정이다. 시는 철학, 문학, 모든 예술의 모체이다. 시를 읽을 때마다 숙연해 지고 동시에 삶의 이유를 점검하게 만들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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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루미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