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에서] Do I make you proud?
2025-10-23 (목) 12:00:00
성민희 소설·수필가
평소에 유령을 보는 아이가 있다. 여러 혼령이 자신이 죽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아이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낡은 학교 건물 천장에 목을 매달은 사람이 울부짖기도 하고 계모의 간교로 죽은 아이가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찾아왔다. 아이의 엄마가 할머니 산소에 올 때마다 묻는 말이 있는데, 육체가 없는 자신은 대답해 줄 방법이 없다며 꼭 전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단 한마디 ‘언제나(Always)’였다.
다음 날 등굣길에 아이는 말했다. 간밤에 할머니의 영혼을 만났다고.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엄마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엄마가 산소에 갈 때마다 할머니에게 물어본 질문이 있다고 하던데? 그 대답은 ‘언제나’라고 하셨어. 아들의 말에 깜짝 놀란 엄마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머리를 양 무릎 사이에 묻으며 흐느꼈다. “내가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나는 정녕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었느냐고”
영화 식스 센스(Six Sense)에 나오는 시퀀스(Sequence)다. ‘Do I make you proud?’ 영화의 주제가 이것은 아닌데도 나는 그 대목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는 당신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였던가요?’. 화면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기에 엄마 산소 앞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묻고 또 물었을까. 이 장면은 한 모녀의 대화를 넘어 인간이 평생을 걸쳐 묻는 존재론적 질문을 담고 있었다.
어머니가 딸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 한 인간으로서의 분투가 어머니라는 절대적 존재에게 자랑으로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어머니의 영혼이 아이를 통해 전해 준 ‘언제나’. 그것은 구원이었을까. 그 한마디가 딸의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그녀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까지 단번에 긍정하는 힘이 되리라 믿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관계 지향성이라는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갈망은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내 편’, 절대적 지지자인 부모의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모의 수용은 곧 자신을 지탱하는 힘의 뿌리다. 더하여 생의 궤적을 함께하는 가까운 이들의 지지와 격려 역시 내가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확실히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회적 안전망이자 울타리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는 당신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인가요?’라는 질문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TV를 끈 뒤에도 그 질문은 귓가에 맴돈다. 많은 사람의 얼굴도 떠오른다. 나는 묻는다. 나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는지요? 나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내인지요? 나는 너희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니? 나는 네게 자랑스러운 친구니? 나도 듣고 싶다.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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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