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명(座右銘)’이란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이다. 또한 이 말은 ‘문선(文選)’에 실린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이란 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최원은 동한시대 저명학자 최인의 아들로 후한의 문학가이자 서법가였으며 초서(草書)로 크게 이름을 날렸고 초서 이론을 제창했다.
그러나, 형인 최장(崔璋)이 타살당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 원수를 죽여 버렸다. 그 후 숨어 지내며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 몇 년 뒤 조정의 사면(赦免)을 받아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깊이 뉘우치고 덕행을 기르고자 글 한 편을 지었다. 최원(崔瑗)의 ‘좌우명(座右銘)’ 95자 속에 있는 말이다
“守愚含光 (수우함광) :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藏 在涅貴不淄 曖曖內含光(무사명과실 수우성소장 재날귀불치 애애내함광)” 명성이 실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은 성인도 지닌 바였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음을 귀히 여기고 어둠에서도 속으로 빛을 지녀라.
‘어리석음을 지키라’는 구(句)는 “속으로 지혜로워도 그것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검은 곳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구(句)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이처럼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잘 섞어 빚어낸 그의 글은 후대 모든 ‘좌우명’의 원조(元祖)가 되었던 것이다.
필자도 좌우명으로 좋아하는 경구가 있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 : 가고 가고 가다보면 알게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실상 이 말은 일찍이 단학(丹學) 연정원(7硏精院)을 세운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선생의 좌우명이며, 문헌 상으로는 소설 ‘丹’에서 실제 주인공 봉우 권태훈의 좌우명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경구(警句)를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산골짜기의 한 도인(道人)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산등성이에 잣나무 묘목을 심고 말했다. “앞으로 100일 동안 산에 올 때 물을 가져와 묘목에 물을 주거라” 이에 한 제자는 의욕으로 충만해서 “저는 매일 두 통의 물을 가져와 주겠습니다.”라고 했고, 또 한 제자는 비장한 목소리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주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세 번째 제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저는 제가 올 수 있는 날에 제가 들 수 있는 양만큼의 물을 가져와서 주겠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첫 번째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말했다. “스승님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수행하는 데 지장도 많습니다.” 스승이 그 제자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거라”
보름쯤 뒤, 두 번째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 말했다. “스승님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정작 수행을 못하겠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렇던가! 편한 대로 하거라.” 세 번째 제자는 100일이 지나고, 1년이 넘도록 쉼 없이 물통을 들고 산을 올랐다.
어느 날, 스승이 세 번째 제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물을 주는 게 힘들지 않던가?” 제자가 말했다. “저의 힘이 되는 만큼 물을 가져가니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점점 근력이 길러져 힘도 세졌습니다.
어린 생명이 자라 강건한 나무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하고, 하고 하다 보면 깨달으리라.(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레 포기하거나, 또는 실패로 좌절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처마끝에서 내린 낙수가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꾸준히 연마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삶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올바른 방향을 잡고, 너무 과하지도, 태만하지도 않게 매 순간 쉼 없이 가고, 가고, 가고, 행하고, 행하고, 행할 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열리게 될 것이기에.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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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