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신과 의사가 노년의 지혜를 말했다. “늙어서는 혼자 잘 살아야합니다. 주변에 친구가 없음을 뒤늦게 한탄하고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은 노인입니다. 친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지요. 세월의 풍상 속에 겨우 한 둘 건지면 다행인 게 친굽니다. 그러므로 친구가 없다 싶으면 없는 대로, 한 둘 있다면 그 한 둘도 가끔 보면 됩니다. 그저 멀찍이 놔두세요. 노년에 그런 허세도 괜찮아요.”
혼자 잘 살라는 말이다. 인간이란 원래가 혼자인데 공연히 외롭다는 핑계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지 말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만나는 친구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고 한다. 웃자는 말이지만 일종의 허세다. 그렇게 생각하면 친구가 많다는 것도 허세, 친구가 없다는 것도 허세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좋았던 인간관계도 가벼워진다. 정중하던 사이가 어느새 정중함이 허물어지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무례한 사이가 되는 일을 쉽게 본다. 특히 흉허물이 없다고 함부로 선을 넘나들다가 어느 순간 원수로 돌변하는 일을 흔하게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일은 자별한 친구와의 “관계 종언(終焉)”이다. 몇 년 전, 서울에 나가 절친과 근 2십년 만에 만났다. 정말 이 친구는 고락을 거의 같이 한 대학친구였다. 그러나 거리가 마음을 측정한다더니 뉴욕과 서울의 거리가 친구라는 고상한 의미를 이미 오래 전에 고갈시켜 버렸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근사한 점심을 함께 먹었으나 속에 있는 이야기들은 끝내 남겨둔 채였다. 대화는 건조했고, 실패하지 않은 노년을 살아간다는 허세만 가득했다.
하루라도 못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했던 젊은 날의 우정은 두어 시간의 만남으로 종을 쳤고 그 후 전화는 언감생심, 어렵게 만나고 온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형식을 갖춘 간단한 소식 두어 번이 전부가 되었으니 정말 친구라는 허세만 무겁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시인 이정하님이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위한 충고가 보이긴 하지만 삭막함이 배어있다. 하여, 사람을 많이 상대하고 자문을 해주는 의사가 결론을 내린다.
“혼자 사는 법을 배우세요. 꼭 사회적 동물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답니다. 친구, 잘해야 본전입니다. 그러니 친구가 아주 많다는 쓸데없는 허세보다는 고독하다는 허세가 늙은이들에겐 실속 있는 편입니다.”
혼자에 익숙하면 얻는 게 많다. 분주함을 핑계로 잘 접하지 못했던 책도 볼 수 있고, 스스로 생을 관조하는 반성문을 써도 좋다. 사람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문학청년이었고 문학소녀였지 않았나.
그간 나를 둘러싼 세상과 함께 너무 바삐 휘둘리며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격리시키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노년을 살아가는 황혼들에게 의사가 “홀로”의 지혜를 권했다는 것은 바람직한 처방이다. 밖으로 다니며 분주하게 사람을 만나야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허세들은 이런 주치의의 경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삼시세끼를 집에서 다 챙겨먹으려 든다면 가정식당 주방장의 손가락 관절염은 어찌한단 말인가.
결국 노년은 어떤 허세로 사는가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의 허세는 다 갖고 있겠지만 허세가 스스로를 경망스럽게 보이는 경지에까지 이르면 곤란하다. 허세가 애교로도 보이고 좌중을 즐겁게 하는 선까지는 괜찮다. 딱딱한 시간을 웃게 하는 허세는 남이 없는 기술로도 볼 수 있으니 허세를 마냥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
예컨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것도 바람직한 허세다.
그러나 자기의 허세를 위해 인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문제다. 타고난 속빈강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허세는 슬픔이다.
어느 노년이 방에 책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 책장에도 바닥에도 널린 게 책이었다. 이 분은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닥에 나와 있는 책에 걸려 넘어져 대퇴부 골절로 입원했고 자녀들이 당장 그 무거운 책들을 처분해버렸다.
읽지도 않는 책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허세도 그만 버려야할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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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