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괴테에서 바흐까지

2025-07-03 (목) 08:12:50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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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 취한 여행자의 기차 노트

▶ 곽노은의 독일 인문학 기행

괴테에서 바흐까지
유럽은 나에게 풍경이자 문장이다. 30년째다. 매년 가도 질리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 20년을 더 걸어도 다 보지 못할 대륙. 이번엔 그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독일에 한 달을 바쳤다. 기차는 익숙했지만, 풍경은 새로웠다. 같은 선로를 달리지만, 매번 다르게 도착하는 기쁨. 이번 여정의 주인공은 대도시가 아닌 마을과 사람, 그리고 그들 곁에 묵은 침묵이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여행. 내가 추구하는 유럽의 기행은 언제나 그런 종류의 시간이다. 빠르게 소비하지 않고, 천천히 곱씹는 여정. 유럽은 그런 여행자를 기다릴 줄 아는 대륙이다.

길 위의 묵상-독일 철도 패스 플렉시
독일 철도 패스 플렉시는 ‘이동’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도 마음이 이끄는 곳이 생기면, 기꺼이 내린다. 잠시 머물러 도시를 걷고, 한 잔의 커피로 시간을 눌러 앉힌 후, 다시 떠날 수 있다. 마치 열차를 전세 낸 듯,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 이 단순한 자유는 때로 가장 철학적인 상태를 만든다. 창밖의 푸른 들판과 붉은 지붕들은 영화의 필름처럼 흘러가고, 나는 그 풍경을 오래된 책장의 활자를 넘기듯 읽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집필하던 책상 앞에 섰고, 루터가 무릎 꿇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숨을 고르며 머물렀다. 뒤러의 그림자가 스며든 방을 조용히 걸었고, 횔덜린이 강가에 섰던 그 자리에 나도 잠시 멈춰 섰다. 바이로이트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는 바그너의 장엄한 선율이 흘렀고, 나는 그 전율 속에 몸을 맡겼다.
괴테에서 바흐까지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독일의 대포 고속열차 ICE, 바흐가 태어난지 이틀 후 세례 받은 게오르겐 교회(아이제나흐), 노란 외벽의 바흐 박물관(아이제나흐), 바흐 전문 연주자와 미니 콘서트를 감상하는 관객들(아이제나흐).



아이제나흐-바흐, 걷고 또 걸어 음악이 되다
아이제나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이곳은 바흐가 태어난 고장이었고, 그의 음악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마음속에 조용히 와서 자리를 잡았으니까. 박물관 안의 낡은 악보들은 연주되지 않아도 이미 소리로 가득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고, 기억으로 새겨지는 악보들. 건물 안은 바흐의 자취로 가득했고, 바깥엔 거장 하나가 말없이 돌처럼 서 있었다. 스무 살의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듣기 위해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무려 472km를 걸었다. 서울에서 부산을 거쳐, 다시 포항까지 올라가는 거리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뤼베크에 닿았을 때 그의 심장은 북을 치고, 종아리는 경고를 울렸을지 모른다. 그의 음악은 책상 앞에서만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고된 걸음과 꿋꿋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화성. 그래서 바흐의 선율은 귀보다 먼저 마음에 닿는다. 위대한 음악은 언제나, 묵묵한 헌신에서 태어난다.


라이프치히-침묵으로 쓴 신앙의 악보
성 토마스 교회. 바흐가 27년간 몸담은 곳. 그는 삶에 외면 당하면서도 모든 악보의 끝에 이렇게 썼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열 명의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손에서 쏟아진 음악은 기도보다 고요했고, 눈물보다 단단했다. <마태수난곡>은 생전에 외면당했지만, 멘델스존이 꺼내 다시 울려주었다. 세상은 비로소, 그 음악이 얼마나 오래된 사랑인지 이해하게 됐다. 그는 지금도 성 토마스 교회 제단 옆, 가장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자고 있다. 거장은 끝까지, 조용했다.

여행자를 위한 정보/독일 철도 패스 플렉시란?
괴테에서 바흐까지

독일 철도 패스 플렉시(사진)는 외국인 여행자에게 넉넉한 자유를 선물하는 열차 티켓이다.
연속형과 플렉시형 중 선택할 수 있으며, 필자는 30일 중 원하는 15일을 골라 탈 수 있는 2등석 플렉시형을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에서 구입했다. 당시 환율 기준으로 2인용 가격은 약 $960이었다. 종이 티켓에 날짜만 기입하면, 독일 전역의 주요 열차(ICE, IC, RE)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좌석 지정은 추가 요금을 내면 가능하지만, 예약 없이도 좌석 위 램프 색상만 확인하면 비어 있는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 달 여정을 마치고 실제 이용한 열차 비용을 계산해보니 $3,200에 달했다. 티켓 한 장으로 세 배 이상의 가치를 누린 셈이다.
예매: www.bahn.de/en
*참고가격(2등, 2인):3일 $512 / 7일 $750 / 10일 $936 / 15일 $1,166(환율 기준 변동 가능)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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