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한동훈은 왜 김문수에게 패했는가?

2025-05-06 (화) 08:03:40 이성열/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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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엔 한동훈은 김문수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젊고, 언변이 뛰어나며, 참신한 이미지에다 스마트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김문수에게 졌다.

이는 단순한 정책 경쟁이나 말싸움의 결과가 아니다. 동양적 정치문화의 뿌리 깊은 정서, 바로 ‘의리’와 ‘충정’의 가치에 대한 민심의 반응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은 오랜 시간 외세의 침탈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의리를 지킨 자’와 ‘배신한 자’를 분별하는 감정의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후, 변절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일종의 본능처럼 작동해 왔다.


‘친일파’라는 단어만으로도 사람의 도덕성이 매도될 수 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다.
삼국지를 보라. 관우가 수많은 명장들 중에서도 유독 추앙받는 이유는 단순한 무력 때문이 아니다.

유비에 대한 그의 지극한 의리, 도원결의 이후 끝까지 함께하려 했던 충정이 그를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 만들었다. 반면 조조는 아무리 유능하고 탁월한 전략가라 해도 배신과 야망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미움을 산다.

한국 정치에서도 이 같은 정서가 뿌리 깊다. 유승민, 김무성 등 한때 주목받았던 정치인들도 ‘배신자’라는 프레임에 갇힌 순간부터 민심과 멀어졌다. 한때 새누리당의 주축이었던 그들은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결단을 내렸지만, 결과적으로는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의리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런 맥락에서 장세동 같은 인물은 흥미롭다. 전두환이라는 독재자의 곁을 지켰다는 이유로 비판도 받았지만, 동시에 끝까지 주군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정 부분 ‘의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결국 사람들은 ‘유능한 사람’보다 ‘신의 있는 사람’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한동훈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 관계였다. 그러나 대중은 그가 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선을 그으며, 오히려 대통령 탄핵론에 앞장선 모습을 통해 ‘배신자’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 명분이 있다 해도, 동양문화에서 은혜를 저버린 자는 쉽게 용서받기 어렵다.

특히 자신을 키우고 도와준 사람을 정적처럼 몰아세우는 모습은 유능함 이전에 인성의 문제로 비춰지기 쉽다.
결국 사람들은 묻는다. “자신을 키워준 사람에게도 의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국민에게는 어떤 신의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 질문 앞에서, 한동훈의 능력은 무색해진다.

그가 다시 민심을 얻고자 한다면, 정책보다 먼저 ‘신의’와 ‘충정’이라는 고전적 가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성열/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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