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가지를 정리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않다. 후다닥 해치우던 일들도 이제는 쉬엄쉬엄 하는 것이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게한다. 어렸을 적에는 이것저것 막무가내로 버린다고 엄마에게 늘 야단을 맞았는데, 이제는 과감하게 버리지도 못하고 혹시나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주춤하게 된다.
해마다 연말이면 한차례씩 입지 않는 옷들을 챙겨 굳 윌(Good Will)에 가져가곤 했는데, 너저분한 옷장을 정리하는 계기도 되고, 소득세 보고때 세금공제 혜택을 받기도 했었다. 2017년말에 은퇴를 한 후, 출근길에 입었던 수트들을 누군가가 요긴하게 입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챙기고 신발정리를 했는데, 굿 윌에 가져다줄 수트가 거의 40여벌에다가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구두와 부츠를 챙겨보니 놀랍게도 29켤레나 되었다. 까만색의 구두가 가장 많았고, 한번도 신지 않은 구두도 몇 켤레 있었는데, 아마도 내 중간 이름을 ‘향남’ 에서 '이멜다' 로 바꿔야되지 않을까?
어렸을 적 빨간 구두와 빨간 책가방을 가지고 싶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는 빨간색은 빨갱이를 상징한다고 어린 내게 늘 파란색의 구두와 책가방을 사주셨다. 어린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생겼던 것일까? 칠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나의 옷장에는 원색인 빨간색을 비롯하여 울긋불긋한 옷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리고, 편하게 신는 운동화들도 화려한 색채를 뽐내며 나를 유혹한다.
70년초에 기성화들이 없던 시절, 성인용 맞춤구두를 신어야 했을때, 난 친구들과 달리 평균치 이상의 발 사이즈로 언제나 주눅이 들곤 했었다. 양화점 직원이 발 사이즈를 잴 때마다, 좀더 발을 작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서 구두를 맞추곤 했는데, 그런 구두를 몇 년간 신고 난 후, 결국 죄없는 내 발가락들만 고생시키고 밉살스런 모양이 되어 버렸다.
하루는, 그런 발가락을 보고 남편이 수술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순간, 발가락 검사후 첫 데이트를 했더라면 어쩔뻔했을까? 라는 생각에 섬뜩했다. 어쨌건, 못 이기는 척하고 발 전문 의사한테 갔는데, 왼쪽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오른쪽 발가락 두개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재미있게도 발가락 속의 작은 뼈들이 붙어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해서 떼어 놓기는 했는데, 발가락 운동을 안해서 다시 붙어버렸고, 이 해프닝은 35년 전에 겪은 나의 유일한 수술경험담이 되어버렸다.
나의 발 사이즈가 다른 친구들과 비해서 크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은 아마 여중때였던 것같다. 친구집에 놀러 갔을때, 벗어놓은 내 구두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보트같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저 신발의 주인이 누구냐고 난리였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왜 자신있게 내것이라고 말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어린 나이에 많이 창피해서 그랬을게다. 어느날 미국 여성들의 구두 평균 사이즈가 내 사이즈라는 것을 알고 무척 흐뭇했었다. 평균 사이즈 7.5는 종류도 많고, 색상이며 스타일이 엄청난데, 요즘은 사이즈 8이 평균 사이즈라고도 한다. 가끔씩, 지인들은 자신들한테 맞는 구두 사이즈가 없다고 불평을 한다. 사이즈 6이나 6.5는 한국을 나가야만 그녀들이 원하는 멋있는 색상과 스타일의 구두들이 널려 있을텐데 구두를 사러 한국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않을까싶다.
좌우지간, 난 미국에 와서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인가보다. 내 발 사이즈가 미국여성들의 평균치인 것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수학보다는 영어를 좋아했고, 덕분에 미국국민들에게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천직을 가졌던 것도 그렇고. 여고때 몇몇 대학의 영문과 주최 영어웅변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갔을 때, 훗날 미국에 정착할 거라는 상상은 못했지만 말이다.
미국생활이 너무도 익숙해져서인지 10년만에 찾은 한국이 낯설기만 했던 나, 그리고 이민 50주년을 앞두고 그저 앞만 바라보며 주류사회에서의 경쟁에 지지않으려 당당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그러다가, 엉뚱하고 재미있는 발가락 수술과 구두 사이즈의 추억을 떠올리며 난, 미국에서 살아야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확인하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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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남 (전) 연방사회보장국 공보부 선임 홍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