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버지니아주 깃발과 폭군(暴君)

2025-02-27 (목) 02:53:57 정성모/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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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의 깃발에는 고대 로마 미덕(美徳)의 여신 비르투스(Virtus)가 창을 들고 황제를 상징하는 자색 의복을 착용한 폭군을 쓰러뜨리고 왼발로 가슴을 짓밟는 장면과 ‘Sic semper tyrannis‘(식 셈페르 튀라니스)라는 라틴어 구절이 담겨있다.

버지니아주의 슬로건으로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되리라’를 의미한다. 미국의 정치인인 조지 메이슨은 1776년 버지니아 협약에서 이 문구를 독립국 휘장에 새기기로 결정했으며, 현재까지도 버지니아주의 표어이자 휘장 문구로 사용되고 있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은 깃발 도안을 만들면서 식민지 착취를 강행하는 영국 국왕을 상징하는 왕관을 그려 넣었다.

폭군은 국민을 힘이나 권력으로 억누르며 사납고 악한 짓을 일삼는 군주를 일컫는 말이다. 왕의 비유적 표현처럼 폭군 또한 어떤 공동체나 집단에서 구성원들을 가혹하게 다루거나 포악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급 인물에게 폭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폭군은 나름 튼튼하던 나라를 순식간에 말아 먹거나 반란이 일어나거나 더 이상 말이 안 통하는 것을 잘 알기에 인재들이 모두 떠나고 간신들만 붙어다니기 마련이다. 윌러 뉴웰의 ‘폭군이야기(tyrants)’ 책에서 나오는 3가지 유형의 폭군 중 ‘영원불멸형 폭군’이 나온다. 한가지 이념을 추구하며, 자기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무리나 상대방들에 대해 묻지마식 학살을 자행하는 폭군이다.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 많은 폭군들이 있었다. 로마제국에는 독보적인 폭군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는 ‘네로’가 있다. 로마제국의 5대 황제였던 네로는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고 화려한, 영화 같은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로마 희대의 미친 놈, 타락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어머니와 임신한 아내를 살해했다거나,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도시를 감상하며 노래를 부른 일화 등이 있다. 결국 인민의 심판으로 무너진 폭군, 과대망상적이며 잔인한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악랄하고 광기를 주체하지 못한 최악의 폭군의 이미지로 강렬하게 기억이 되고 있는 연산군이 있다. 조선 10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한마디로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최고의 쓰레기 왕이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청렴결백한 사림을 개인적인 원망으로 살해하였다. 재위 13년 중 2년 반 동안 광란의 칼춤으로 연산군 특유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드러내며 비정(非情)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고 만다.

또한, 연산군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음무도(荒淫無道)에 빠져들었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심하게 술주정을 했는데, 다음날 전혀 기억하지도 못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요(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라는 글귀가 새겨진 신언패(愼言牌,tag)를 목에 걸게 했다. 한마디로 살고 싶으면 입을 닥쳐라!

2024년 12월 3일 삼천리 금수강산의 밤은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서울의 한복판에서는 한 편의 영화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에서 느닷없이 소름끼치는 헬리콥터 소리가 나더니 무장한 군인들이 떼거리로 내려왔다. 네온 빛 반짝이는 지상에서는 중무장한 장갑차 행렬이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시민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이 반헌법적이고 비현실적인 비상계엄을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기습적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TV로 생중계되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지켜보면서 살얼음이 되어 뜬눈으로 광란의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민주주의가 현재까지는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이긴 하지만 허약한 면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악용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이나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집단이 분명히 존재한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언제든지 폭군에 의하여 무너질 수 있는 체제이므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지켜나가야 한다. 권력을 남용하는 자는 반드시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국민이 준 권력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데 사용한 대통령은 내란죄 혐의자가 되었다. 구치소 유니폼으로 환복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국민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실패한 내란은 호수 위에 비친 달도 아니고, 사막에서 나타나는 신기루도 아니다. 외세의 침입에 결연히 맞서다가 쫓겨나는 비운의 왕이 된 것도 아니다. 잘못한 일체의 행위 결과에 대해서 궁색한 모습이나 3비(비겁-비열-비루)의 변명보다는 당당하게 인정하는 게 대통령으로서 최소한 품위이고 울림이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머리 잘린 거북이 꼴이 되었지만, 본인 집무실 책상위 명패에 새겨져 있는 ‘The BUCK STOPS here(내가 결정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문구를 실천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용비어천가만 불렀다. 헌재에서 행한 대통령의 최후의 아무말 대잔치를 듣고 패가망신한 네로와 연산군의 환생을 다시 곱씹게 되는 역겨운 현실이 참담하고 고통스럽고 분노스럽다.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되리라‘는 버지니아주 깃발의 슬로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성모/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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