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후배의 방문

2025-02-27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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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후배가 여행 중에 우리 집에 들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접한 날부터 남편의 목소리는 한음 올라갔고, 틈만 나면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잊은 채, 40년의 세월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간 그는 교정 구석구석에서 젊은 자신을 불러냈다. 그를 따라 나도 그 시절로 갔다. 그와 함께 공부하던 도서실이며 교정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커피 마시던 오후, 목표를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학위를 마친 후의 삶을 그렸다.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우리는 미국에 남았다. 사십 년의 세월 속에서 몇 번이나 진로를 바꾸며 우리의 삶은 그때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때 스물다섯의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그의 따뜻함과 넉넉함이 여전하니 그리 다르게 살아온 것은 아닌 듯싶다.

몇 주 전부터 마음이 부산한 그는 그 후배 부부를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머무는 동안 어디를 구경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바쁜 와중에도 보여 주고 싶은 장소를 미리 답사하기도 했다.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는 그가 보기 좋았다. 어릴 때의 친구는 성인이 되어 만나는 친구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사회적인 지위와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일반적인 관계와는 다르게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면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그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함께 하지 못한 긴 세월도 쉽게 건너뛰고 금방 한 마음이 된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이 거기에 있다.

후배 부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도착했다. 한국에서 은퇴한 그는 아틀랜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였다가 함께 크루즈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올란도에서 떠나는 크루즈 여행을 하고 다시 아틀랜타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렀다. 처음에는 점잖게 인사말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학 시절의 말투로 바뀌었다.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이 작은 가시 하나 없이 흐물거리며 녹아 우리 모두를 대학 시절로 이끌었다. 이미 주름이 자글거리고 숱이 없어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노인의 모습인데, 마음은 청춘이 되어 대학 교정을 누비고 다녔다. 입속에서 뱅뱅 돌면서도 생각나지 않는, 같은 과 학생의 이름을 서로 도와 기억해 내기도 하고, 그가 했던 이상한 몸짓을 흉내 내며 배꼽을 잡기도 했다.


졸업 후 각기 다른 곳에서 살아낸 서로의 삶을 다투어 이야기하기도 했다. 진지한 눈빛으로 함께 하지 못한 그 시간들을 이제라도 같이 하려는 듯 경청하였고, 중간중간 아고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잘했네, 훌륭하다 훌륭해.. 하며 서로의 삶에 박수를 쳐 주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그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에도 그 부부가 남긴 온기로 마음이 따뜻하다. 입가에는 미소가 여운처럼 남아있다. 다시 오늘을 살기 위해 현실로 돌리는 발길이 여느 때보다 가볍다. 한 이십 년은 젊어진 듯 몸놀림이 예전과 다르다. 새 힘이 솟는다.

<허경옥 수필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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