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대가인 고려의 마지막 재상 정몽주는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로부터 조선의 신하가 되길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정 몽주는 “선비는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고하며 고결한 선비 정신으로 지조를 지켰다. 태종 이방원을 시켜서 계속 회유를 했지만, 확고한 정 몽주의 의지를 확인하고, 이방원에 의해 참살당했다.
정몽주처럼 주군에 대한 정절과 지조를 소중히 여긴 선비도 있었지만, 고려가 망한 후 이씨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이 태조의 부름을 받아서 고려와 조선을 아울러 6대에 걸쳐 여섯 왕을 탁월한 능력으로 보필한 선비가 있었다. 이씨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칭송 받았던 영의정 황희다.
황희는 고려 32대 우왕 때 14살의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관직에 등용된 이유는 음서제도(공신의 자제에게 주어지는 특별 관직 수여제도)에 의해서 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우왕, 창왕, 공양을 이어서 이씨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시게 된다. 개국 초기에는 이 태조에게는 국정을 안정시킬 훌륭한 인재가 필요했다. 중신들이 이구동성으로 황희를 추천했다. 27세에 세자를 훈육하는 우정자를 제수받고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태조는 황희의 총명하고 능력과 고결한 인품을 높이 사서 황희에게 성균관의 문화부 유습유의 관직을 내린다.
개국 초기에는 개국 공신들과 과거를 통해 등용된 신진사류들 간에 권력 암투가 심했다. 이 어려운 정치적 와중에서도 황희는 모든 공신들, 성균관 학사들과 조정 관리들에게 화평을 강조한 탕평책을 편 결과, 황희의 행정 능력은 태조와 모든 조선 중신들과 공신들로부터 신임을 한몸에 받고 일취월장 한다.
태조 이성계를 이은 태종 이방원은 황희의 탁월한 정치와 행정 능력에 탄복하고 중히 신임하여 43세의 황희를 태종의 지신사(비서실장)에 임명했다. 황희는 태종의 기대에 부응하여 태종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태종이 정사를 구상할 때 제일 먼저 황희와 의견을 나누는 태종의 책사가 되었다.
비단길을 걷던 황희는 첫 번째 시련을 마주한다. 과거에 낙방한 한 선비가 황희를 찾아 와서 노발대발하며 황희 때문에 낙방을 했다고 신문고로 고발했다. 황희는 자신이 직접 과거를 심사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지만,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서 태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태종은 크게 노하며 사직서를 즉시 반려하며, 한 걸음 더하여 공조판서에 임명해 버렸다. 태종이 얼마나 황희를 신임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황희는 승승장구하여 조정과 온 나라 백성들로부터 명재상, 즉 황희 정승으로 칭송받았다. 54세의 황희는 지진사를 맡은 지 10년 만에 병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까지 6조의 판서(지금의 장관)을 두루 맡아서 그의 신념인 화평과 탕평을 실천했다. 황희는 최종적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18년간을 영의정으로 봉직했다. 70세의 고희를 넘었을 때 태종께 사직서를 올렸다.
태종은 반려하기를 반복해서 황희는 결국 87세에 사직이 허락되어 고향으로 낙향했다.
황희의 고결한 인품과 탁월한 정치 및 행정 능력에 탄복한 태종은 조정 대신들의 면전에서 “내가 죽는 날에 황희도 나를 따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황희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얼마나 황희를 사랑했으면, 저승까지도 함께 동행하기를 원했을까.
황희의 인품과 덕망은 가내에서도 그 향기를 풍긴다. 황희의 가솔들은 황희를 전혀 어려워 하지 않았다. 인심 좋은 주인, 자상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날 머슴의 3살난 아들이 황희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부리다가 황희의 수염을 잡아 당기며 재미있어 했다. 이를 지켜본 머슴은 사색이 되었다.
황희는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너도 수염을 기르고 싶어냐”라고 물으면서 아기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균관의 학사들이 황희를 찾아 와서 “반상의 법이 유별한데, 종놈의 아이가 어찌 대감의 수염을 가지고 장난질을 할 수가 있느냐”라고 하며 통분을 금하지 못한다.
황희는 정색하며 “어른은 애들과 싸우지 않는다. 인(仁/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 지식이 충만한 사람은 무식한 사람과 싸우지 아니한다. 높은 인격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은 이해한다. 세상 일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감정대로 반응하지 말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라. 또한 물질과 명예는 내 인격만큼 가지면 된다. 내 인격 이상으로 가지면 불행해 진다.”라고 말하며 학사들에게 덕을 쌓으라고 가르쳤다.
지(智), 인(仁), 효(孝)를 선비의 본분으로 삼는 선비 정신은 고지식하고 꽉막힌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학문적 성취와 수양을 통해 화평과 융합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나를 등진 타인을 배려하며 통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의롭고 기품있는 마음의 성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꽉 막힌 사회 현상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길을 피하고 번영의 길로 행진할 수 있는 방법은, 조선의 선비와 선비 정신을 본받아 실천하여 대한민국이 처한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