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슬픔과 아픔은 다르다

2025-01-03 (금) 12:00:00 조 모세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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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바늘에 찔렸다. 아프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아프지 않다. 그러나 슬프다.

우크라이나가 폐허가 되어 가는 뉴스를 보면서, 자기 손에 피 안 묻히면서, 젤렌스키는 진정한 지도자, 푸틴은 파괴자라고 떠드는 자유민주주의 사람들. 국가 전쟁에 돈 몇 푼 주면서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경제 대국의 사람들. 남의 마당이 짓밟혀도 내 집 마당에 잔디 다듬는 세기의 재벌들. 이런 뉴스를 재미없다면서 재미로 보는 나. 슬프지만, 아프지 않다.

커피를 마시면서 지인이 한마디 던졌다. “누구나 다 아는 뉴스 따위를 보고 슬프다고? 그것이 너만의 슬픔이냐?” 그의 문학 강의가 시작됐다. 나만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되어야 문학이라고,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나만의 슬픔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글을 쓰라고, 열변을 토한다. 열변 때문인가, 지인의 손이 흔들리면서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얼마 전부터 오른손에 이상이 생겼단다. 아무도 모르는데 오늘 탄로가 났다면서 웃는 듯 괴로운 듯한 모습이 어두웠다. 홀아비로 살아도 당당하고 깔끔했는데, 품위 유지를 하려고 많이도 애를 쓴 오른손이, 하필, 열변 중에 신분을 드러냈을까? 그건 그만의 슬픔인가. 나도 슬퍼해야 하나.


나만의 슬픔이 무엇일까. 나만의 슬픔은 없었던 것 같다. 나만의 아픔만 있었다. 내 손가락을 다쳤을 때, 슬프지 않고 아팠다. 내 몸에 손해를 끼치는 것들은 모조리 아프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들은 무조건 아프다. 어떤 것들은 뼛 속까지 아프다. 아픔은 다 나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아픔을 느끼면서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영원한 세상으로 가셨을 때, 20년 이상 수발을 들었던 나는 슬프지 않았다. 지독하게 아팠다. 슬픔이 아니라 아팠다. 슬픔은 생각이고 아픔은 현실이다. 아픔은 생각이 아니고 나만의 이야기다. 아파하는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슬퍼해 주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나만의 아픔이 나의 존재다. 아픔이 다 나으면 흔적이 남는다. 그것은 아픔이 끝난 증거다. 흔적을 보면서 슬퍼하는 것은 아픔이 아닌 추억일 뿐이다. 나만의 아픔이 끝나면, 나의 이야기도 끝난다.

나의 아픔을 보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나의 이야기에 슬퍼하고 공감하는 당신은 정작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나의 아픔이 되지 않는다. 슬픔은 우리의 이야기일 뿐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 대신 아파 주거나, 나만큼 아파할 ‘우리’는 없고, 함께 슬퍼할 우리는 많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생각일 뿐이고, 그 생각은 몇 초간 유효하다. 슬픈 생각을 주는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재미도 있고 공감도 시작된다. 슬픔을 문학으로 공감하고, 아프지 않으면서 슬퍼하는 나는, 슬프게 하는 것들을 찾아다닌다. 남의 이야기에 슬퍼하지만 아프지 않은 내가 문학을 한다니, 아픔이 웃을 일이다. 나의 아픔을 나와 같이 아파할 당신을 찾아서 오늘도 마켙에 들른다.

<조 모세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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