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00세 시대, 당당하고 활기차게…”

2025-01-02 (목) 08:29:54 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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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2막 도전 실천 ‘新중년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린 학생들에게 했던 질문을 은퇴한 시니어들에게 다시 묻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고민이 되는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다. 품위 있게 나이를 먹고, 품위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나이를 핑계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여전히 배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는 손종락 대표는 은퇴한지 10년만에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피아노 반주자로 봉사하는 이은숙 목사는 “무언가를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100세 시대, 당당하고 활기차게…”


◆교사에서 사업가로, 사모에서 목사로…워싱턴야베스대 이사 이은숙 목사
“은퇴 후에도 도전은 계속…배우고 노력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


“1980년 4월 5일 미국에 왔다.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언어도 문화도 낯선 이국땅에서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17년간 교사 생활을 했던 경력과 무관하게 바느질을 배워 세탁소에 일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렇게 40년 넘게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다.”

매달 메시야장로교회에서 한미나라사랑기도회가 열린다. 기도회 반주자로 봉사하는 이은숙 목사는 가장 큰 목소리로 찬양하며 씩씩하게 ‘아멘’을 외친다. 참석자 대부분이 80~90대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 목사의 피아노 연주와 활기찬 목소리는 기도회를 이끌어 가는 힘이 아닐 수 없다. 은퇴한 후에도 쉬지 않고 힘차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 목사에게 사실 은퇴는 없었다.

▲30대에 도미, 새로운 도전
1947년생인 이 목사는 인천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동료 교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자식(1남1녀)도 키우며 성실히 살아왔다. 그러다 30대에 돌연 이민을 결심하고 1980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왔다. 식목일(4월 5일)에 미국에 도착해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결심에는 버지니아에 이민 와 살고 있던 형제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 교사 부부였던 이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도 씩씩하게 주눅 들지 않고 이민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40년간 세탁소, 그로서리, 델리 등을 운영하다 6년전 은퇴했다.

▲목사가 되다, 두 번째 도전
한국에서는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심지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던 그가 미국에 와서 크리스천으로 거듭났다.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에 출석하며 남편이 먼저 신학공부를 시작해 목사가 됐고 버지니아 웃브릿지에 ‘순복음우리들의교회’를 개척했다. 남편을 내조하며 혼자서 사업체를 운영했던 그는 건강했던 남편이 지난 2000년 갑자기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남편이 했던 것처럼 신학교에 들어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 목사도 7년전 심장 수술을 받고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헌신했고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도전은 계속된다
수술을 받고 돌아온 이 목사는 2014년 워싱턴야베스대(이사장 박엘리사 목사) 설립 당시부터 이사로 일하며 신학생 양성에 헌신하고 있다. 또한 워싱턴그레이스사모합창단(지휘자 이철 목사)의 창립 멤버로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으며 매달 한미나라사랑기도회에서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남편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반주자를 구하지 못해 직접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덕을 보고 있다”며 “무언가를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시련을 겪으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신이 생겼다”며 “우리 이민자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현역에서 은퇴하더라도 우리의 도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00세 시대, 당당하고 활기차게…”


◆은퇴후 10여년 만에 다시 창업, 제2 전성기 누리는 손종락 대표
“늙은이라 괄시받지 말고 일을 찾아서 하자”


“늙은이라 괄시받지 말고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자.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좋고 여유가 있다면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몫을 해야 한다. 그러면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다.”

1936년생인 손종락 대표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전형적인 자수성가(自手成家) 사업가로 남부럽지 않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으나 은퇴하고 10여년 만에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1월 워싱턴 DC에 카나블리스(CannaBliss) 제품을 생산, 유통하는 회사(SK Quality Services)를 설립해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가출 소년의 도전은 계속된다
경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손종락 대표는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에게 반항하다 결국 중학교 시절 가출했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의 도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시절에는 모두 가난했지만 다들 열심히 살았다”며 고학생이었던 그는 건국대에 입학해 영어를 전공했고 덕분에 미군 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미8군 인사처에 일했던 그는 1974년 미국에 왔다. 특별한 준비는 없었지만 다행히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버지니아 폴스처치에 위치한 편의점(High’s)에서 일을 시작했고 2주 만에 매니저로 승진했다. 한인 이민자의 특징인 근면, 성실은 물론 영어를 하는 동양인이 드물었던 탓에 점주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소수계 사업자를 위한 정부 지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니저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자리였겠지만 그는 더 큰 시장으로 나아갔다.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사업 자금을 마련해 델리를 오픈했다. 뉴욕 스타일의 정통 쥬이시 델리는 손님도 많고 특히 워싱턴 정계 인물들도 즐겨 찾는 단골집이 됐다. 이들과 교류하며 연방정부 조달 사업에 대해 알게 됐고 특히 소수계 사업자를 위한 SBA 프로그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군납 업체(Sohn’s Quality Food)를 차려 군부대 내 식당을 운영하게 됐고 워싱턴에서 손꼽히는 정부 계약 업체로 성장시켰다. 그는 지난 2011년 은퇴하고 지금은 둘째 아들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한 그는 거의 매일 골프를 치며 여유로운 은퇴자의 삶을 즐겼다. 그러나 사업가로 평생을 보낸 그에게 은퇴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유는 나태로 이어졌고 생각도 둔해지기 시작했다”는 그는 더 이상 쉬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술이나 담배보다 10배 이상의 시장을 갖고 있다는 카나블리스 제품을 생산, 유통하면서 10여년 만에 다시 사업가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 “나이들수록 돈이든 경험이든 베풀어야”
손 대표는 “앞으로도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나이는 숫자일 뿐 더욱 열심히 활동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며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여러 단체에 100만 달러 이상 기부했다는 그는 “돈은 어떻게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며 “죽으면 싸가지도 못하는데 좋은 일에 쓰는 게 맞다. 자식들에게도 남겨줄 생각이 없고 전부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이 때문에 위축된 시니어들에게 그는 “받기보다는 주고, 원로면 원로답게 돈이든 경험이든 베풀어야 한다”며 “소수계 이민자인 우리 한인들이 힘을 뭉쳐서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우리가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인 이민 1세의 간절한 마음이 여전히 그를 현역으로 활동하게 만들고 있다.

<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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