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윌셔에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2024-12-19 (목) 박연실 수필가
크게 작게
길을 잘못 든 모양이다. 불빛이 보이지 않아 사방이 어둡다. 산길을 벗어나 옥수수밭 사이로 난 길을 30여 분 달렸다. 도무지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들판이 이어졌다. 되돌아갈지 아니면 내비게이션을 믿고 계속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산속의 해는 일찍 져서 날은 어둡고 산길을 되짚어 나가기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불빛이 보일지도 모르는데 포기하기에는 억울할 것 같기도 했다.

계속 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예약한 숙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차에서 하룻밤 지새면 그만이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먹을 것은 과자 몇 봉지와 물이 있으니 아주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옥수수밭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호텔이 불쑥 나타났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성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은 하나도 없어 옥수수밭 사이에 솟은 뾰족한 지붕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래도 불이 켜있고 로비에서 사람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극한 상황까지 생각하다 호텔에 들어선 때문인지 욕심은 소박해 졌다.


젊은 날에는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나곤 했다. 가다가 차가 막히거나 휴가철에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미련 없이 되돌아 왔다.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미리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딱히 고생스러웠다거나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때는 새로운 경험이라 재미있었다.

육십을 넘으니 매사에 조심스러워졌다. 되도록이면 계획하고 준비하여 떠나려 한다. 그렇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쳐 난감해지기 일쑤다. 젊었을 때는 길을 잘못 들면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힘과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곧바로 계획을 바꾼다. 지난 주말에도 바닷가에 가려다 중간쯤에서 점심만 먹고 집으로 왔다.

이제 잘못된 길을 갈 확률은 많지 않으나 앞만 보고 가야하는 시점이라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변화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기에는 살아온 날이 적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꾸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애쓰며 살았고 매순간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에 망설임과 고뇌의 젊은 날을 보냈다. 그 시절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후회나 미련으로 바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홀가분하고 좋다.

요즈음은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싫은 일은 줄이고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 마음이 즐거운 일을 찾아 하게 된다. 좋아하는 일에 정성 들여 시간을 쓰니 지루하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일랜드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던 조지버나드 쇼의 유명한 묘비명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가 가끔 생각나면 웃음이 난다. 학창시절,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어쩐지 나도 그렇게 살게 되리라 예감했다.

육십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사는 것은 서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 갈 것 같다. 내 묘비명은 무어라 쓸까. “이리저리 길 찾아 헤매다 너무 멀리 왔네”가 적당하려나.

<박연실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