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새 영화 ‘아노라’ (Anora) ★★★★½ (5개 만점)
▶ 노골적이고 화끈한 섹스신과 활기차고 화려한 표면 안에는 신분 차이에 대한 비판 담아
이반(왼쪽)과 애니가 라스 베이가스의 분위기를 신나게 즐기고 있다.
자기 하는 일에 대해 불평불만 하지 않는 직업 창녀의 드라마요 신데렐라 이야기이자 야단법석을 떠는 스크루볼 코미디인데 영화 저변에는 애잔한 슬픈 기운이 흐르고 있다. 올 칸영화제 대상 수상작으로 요란하고 생명력과 에너지가 넘쳐흐르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에 탄 기분이다. 노골적이요 화끈한 섹스신도 있는 활기차고 흥미진진한 영화인데 화려한 표면 안에는 사회주변인물에 대한 연민과 함께 신분과 계급차이에 대한 비판을 함께 안고 있다.
때는 2018년. 애니로 불리기를 바라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뉴욕의 남성전용 클럽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춤의 파트너가 되어주고 더불어 몸까지 파는 창녀. 러시안 아메리칸 인 애니는 자기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도 또 멸시하지도 않는 철저한 직업여성이다. 애니가 어느 날 만난 손님이 러시아 억만장자의 아들 이반(마크 에이델쉬테인). 이반은 애니를 자기 저택으로 데려가 하룻밤 섹스를 즐기는데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반한다.
이반은 계속해 지껄여대는 주의가 산만한 비디오게임 중독자로 돈을 물 쓰듯 하는 철이 아직 덜난 아이 같은 청년. 애니의 단골손님이 된 이반은 애니를 브룩클린 해변에 있는 맨션에서 열린 신년전야 파티에 데려가는 등 극진히 대접하면서 애지중지 한다. 이에 신이난 애니.
어느 날 이반이 애니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한다. 애니를 1주일 전세 내 함께 라스 베이가스에 가서 즐기자는 것. 클럽 매니저의 불만을 무시하고 애니는 백을 꾸려 이반과 함께 전용비행기로 베이가스에 도착, 닥치는 대로 쇼핑을 하면서 둘이 신나게 ‘죄악의 도시’ 분위기에 푹 잠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반이 애니에게 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면서 구혼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애니. 둘이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들이 창녀와 결혼 한 것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가 뉴욕에서 자기 재산과 이반의 생활을 돌보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토로스(캐런 카라굴리안)에게 아들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애니를 이반의 집에서 쫓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토로스는 자기 하수인 가닉(바체 토브마시안)과 이고르(유라 보리소프)에게 애니 축출 지시를 내린다. 그런데 이 두 건달들은 약간 덜 떨어진 사람들로 둘이 해내는 멍청이 같은 연기가 폭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둘이 득달같이 이반의 집에 들이닥치자 이반은 애니를 놔둔 채 줄행랑을 놓고 둘은 애니를 잡아놓는다. 그런데 애니는 보통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타오르는 불길 같은 맹렬한 애니는 두 건달을 상대로 입에서 상소리를 쏟아내면서 육신을 총동원해 맞선다. 이 과정이 배꼽이 빠지도록 우습고 박진한데 이 같은 대결을 하는 중에 역시 주변인물인 이고르는 부자의 하수인인 자기의 처지나 다름없는 애니에게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반은 자기 집에서 애니와 두 건달 간에 액션이 벌어지는 동안 밤새 뉴욕의 술집을 전전하면서 술과 약물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다. 마침내 이반의 부모가 전용비행기로 뉴욕에 도착한다.
영화 처음부터 애니가 진짜 신데렐라가 되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거침없이 몰고 가는 션 베이커 감독(극본 겸)의 날렵한 연출력이 돋보이는데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도 아주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매디슨의 연기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고 질풍노도와도 같으면서도 연약한 모습도 함께 갖춘 그녀의 연기가 눈부시다. 그리고 철없는 아이처럼 구는 에이델쉬테인도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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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