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들이 오후에 샌 디에고(San Diego)로 출장을 가기 전에 인사하러 집에 온다고 했다. 마침, 특별히 할 일도 없던 참이라, 공항까지 배웅하고 싶어 함께 나섰다. 공항 청사에 들어서자, 8년 전 덜레스 공항에서 아들 네 가족을 한국으로 떠나보냈던 2016년 7월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들네 식구들을 한국으로 떠나보내던 그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고, 아이들이 보안 구역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들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오려고 하는데, 너는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말하며 반대했으나 아들은 단호하게 “한국 근무가 확정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의 장래가 걸린 문제였고 이미 직장에서 결정된 일이었기에 더 이상 반대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 교육”을 이유로 설득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탓에 한국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어린 손자와 손녀들에게 한국은 조국이면서도 낯선 외국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새로 운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며 겪게 될 고생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고, 그 때문에 여러 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이 한국으로 가는 상황은 내가 유학을 위해 떠나왔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이 나보다 부족해서도 아니고,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아들과 손자들이 낯선 환경에서 겪을 어려움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이 전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조국으로 아이들을 보내면서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던 그날, 문득 40년 전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날 김포 공항에서 어머니와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제 아들네 가족을 낯선 나라로 보내는 지금, 그때 어머니가 느끼셨을 섭섭함과 걱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다녀오너라” 하시며 눈물을 삼키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어머니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으셨다. 그저 떠나는 아들이 잘 다녀오기만을 바라 는 마음뿐이었겠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때 어머니의 마음에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엄마의 사랑’이 가득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 사랑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로지 유학의 꿈과 미지의 세계에서 시작할 삶에 대한 불안감만 가득했었다.
내가 아들네 식구를 떠나보내며 느꼈던 그 감정을 그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조금이라도 이해했었더라면, 서운해하셨던 어머니를 위로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제야 철이 든 지금,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남은 것은 늦어버린 후회뿐이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말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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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수필가,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