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재적소(適材適所), 흔히 고위공직자 인사에 쓰이는 말인 줄 안다. 하지만 거기에 국한된 말뿐이겠는가.
넓게는 온갖 직업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고귀한 직업을 사람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고귀한 분이 있나하면, 거기에 도대체 걸맞지 아니한 못된 부류의 인간도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의 직업을 사명감으로 승화시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호구지책으로, 치부 수단으로, 고귀해야만 될 직업을 오용(誤用), 남용(濫用), 과용(過用)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되는 현실을 우리들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여겨진다.
남들이 될수록 피하기도 하는 일들을 하여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내세우기 곤란한 직업을 가진 분들 중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해 대중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며 위안과 기쁨을 자신은 물론 대중과 함께 공유하는 경우는 그 직업을 한층 고결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늘 불평, 불만한 하고 성실치 못할 때 그의 더 나은 발전은 없을 것이며 대중들 또한 피해 당사자가 될 것이다.
너무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 직설적으로 예를 들고자 한다.
청소미화원이라 하든가 환경 미화원이라고 하든가, 차치하고 그가 성심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 해 거리가 산뜻해졌을 때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깨끗해진 거리환경에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 아니겠는 가. 미화원 자신도 즐겁겠지만 편안해 보이는 대중들, 시민들을 접할 때 더욱 흐뭇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즐거움의 상승 배가 효과가 아닐까 한다.
몇 대를 이어오며 도자기를 굽는다거나 악기를 만드는 등 장인정신이 투철한 분들 또한 자신과 남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한다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했을 직업들이 아닐까. 이런 분들은 자신들의 적성, 자질, 능력을 이미 알고 과욕 없이 스스로 적재적소에 투신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겠는가.
환자를 돌보는, 그것도 보통 환자가 아닌 암 환자 병동의 간호사님들, 참으로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이해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성의를 다해 의사들, 가족들을 대신에 그 환자를 돌본다면 금상첨화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하지만 피곤해서, 일 부담이 너무 버거운 반면 인력부족으로, 아니면 가정불화가 직장일로까지 연장이 되는 꼴의 경우 등등의 경우, 환자의 간호를 원활히 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사태를 초래한다면 불만 이전에 환자의 안전에 위험성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단지 한두 번뿐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도 있겠으나 전력에 흔한 경우가 있었다면 그 직업엔 맞지 않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들의 속담처럼, 말이란, “어”해서 다르고 “아”해서 다르다는 말도 있지 않다. 힘든 사람들 대하는 직업군들, 특히 의사, 간호사, 성직자들은 특히 말씀에 더욱 신경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부분의 분들은 훌륭하지만 말이다.
어디서나,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들이라곤 하지만 근래 조국에서 일어났었던 일련의 사고들인 대량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나 단 한명의 희생자가 났다 하더라도 책임자 처벌은 물론 최종 책임자 법적책임 여부를 떠나 도의적으로 책임통감은 물론 진솔한 사과의 변이 반드시 있어야 마땅하거늘 현재까지 정황으로 보아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울화가 솟지 않을 수 없음은 비단 필자뿐이 겠는가.
여기엔 국가의 수장도 예외가 될 순 없다. 권한과 존경심이 따르는 위치나 직업군일수록 그에 비례해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능력, 자질, 도덕관념을 일컬어 체격(體格)이라고 비유했을 때 그 체격에 과분하게 어울리지 않는 큰 옷을 입고 좋아라 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우스운 세상이다. 여기까진 그렇다 하더라도 더 나아가선 사회에 위험천만(危險千萬)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로다! 진정한 적재적소라는 말의 유래를 알 것 같다.
<
문성길 의사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